장맛비가 계속되고 있다. 올해는 유난한 장마라 강수량이 엄청나다. 비가 오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차분히 더 가라앉으면 조금씩 우울해진다. 휴일 딸애와 뒹굴거리다가 낮잠도 자다가 기분전환 겸 산보를 나갔다. 비는 소강상태라 우산을 접어들고 공원으로 갔다. 공원에는 우리 둘뿐 인적이 거의 없어 한적했다. 공원을 지름길로 가로질러 바삐 걸어가는 사람만 간혹 보였다. 딸애도 나도 모처럼의 여유다. 온통 바쁜 일 투성이인 세상이라 한 집에 살아도 일상적인 대화 외엔 서로를 들여다 볼 시간이 별로 없다. 딸애는 비오는 날씨 탓인지 감상에 젖어 내 허리를 안고는 다정하다. 둘은 철부지 연인처럼 우스개 농담도 하고 고인 물로 장난도 치고 나뭇잎에 매달린 빗물로 멀리 튕기기 놀이도 하며 모처럼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냈다.
공원 산책로를 따라 위쪽으로 걸어가는데 정자에 누워있는 사람이 보였다. 순간 움찔했지만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에 용기가 났다. 비오는 날 빈공원에 빗물에 젖어있는 정자바닥에 누워있는 사람, 긴장이 돼 걸음을 빨리해 걸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누워있던 할아버지다. “비가 왜 이래 많이 오는지 알우?” 뜬금없는 질문에 딸애는 내 뒤쪽으로 물러서 여차하면 도망칠 궁리다. 할아버지의 말끔한 의관이 긴장을 풀어주기는 했지만 온갖 이상한 사건들이 뉴스에 나오다 보니 할아버지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취하신 듯했고 소주잔에 술을 따라 우리에게 건넸다. “올해처럼 비 많이 오던 해 물난리에 내 마누라가 죽었어….” 그 말만 귓등으로 들었다. 딸애가 내 손을 잡고 냅다 뛰기 시작해 나도 얼떨결에 뛰었다. 한길까지 정신없이 뛰어나와서야 딸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안도하는 눈치다. 엄마는 무섭지도 않아? 왜 말 상대를 해주는 거냐고 걱정을 들었다.
공원길 건너 찻집에서 비 내리는 거리를 내다보며 딸애와 커피를 마셨다. 우두둑 비가 쏟아지는 풍경을 보고 있는데 내 어릴 적 기억이 불쑥 떠오른다. 오래전, 옆집 온냐할머니는 비만 오면 동네를 헤매고 다녔다. 딸이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며 비가 내리면 낮이고 밤이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비에 젖어 산발한 할머니 모습은 혼자 마주치면 섬뜩할 정도로 무서웠다. 누구든 붙잡고 “우리 온냐 봤지. 어디 있더노? 빨리 갈쳐다고.” 모른다고 해도, 소리를 질러도 할머니는 꽉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온냐는 할머니 막내딸 이름이다. 남편이 부르던 딸의 애칭인데 딸이라면 그저 예뻐서 만사 오냐오냐 하던 남편 말을 따라 오냐오냐가 부르기 쉽게 온냐가 됐다고 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채 두 돌도 되기 전에 남편이 갑자기 죽어 할머니는 광주리장사로 아이 셋을 키웠다. 광주리장사 나간 사이에 5살 딸이 엄마를 찾아 나섰다가 행망이 묘연했다. 배고픈 오빠 둘은 비를 맞으며 동네 형들과 미꾸라지 잡기에 바빠 동생 건사에 소홀했고 막내딸은 배고프다고 칭얼대다가 엄마 찾으러 간다며 오빠들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이는 물이 불은 개천을 건너다 실족사했고 어둑해질 무렵에서야 논물을 빼고 오던 옆 동네 사람에게 발견됐다.
철공소를 크게 하는 아들 덕에 여유로운 노년을 보냈지만 할머니 가슴속에는 막내딸 온냐가 살을 후미며 들어앉아 있어 우리 어머니가 결국 치매에 걸렸다고 효자 아들은 늘 가슴 아파했다. 딸애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눈물 글썽한 눈으로 듣고 있던 딸애는 “아까 그 할아버지도 비만 오면 할머니 생각에 애절해져서 그랬나? 위로해 줄 걸”한다.
애절하게 묻고 또 물어보든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 온냐 봤지 어디 있더노? 온냐야 엄마가 데리러 갈게, 울지 마라.” 사내아이들은 비귀신이라고 놀리고 여자애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쳤던 온냐할머니는 치매로 기억이 사라져도 온냐 이름만은 돌아가실 때까지 붙들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가 있고 평상시는 바쁘게 사느라 덮어두어도 비오는 날엔 가슴 밑바닥에 고인 애잔함이 빗물을 타고 떠오른다. 잃어버린 귀중한 것들이 쌉쌀한 슬픔으로 추억되는 우중일. 회환은 삶의 상처도 되지만 성숙도 준다. 착잡함으로 무거운 회환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장마철이 되면 좋겠다. 아니다, 어쩌면 가장 선량해지는 시간을 누리라고 장마라는 시간대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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