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발이 기품 있어 보이는 그녀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눈빛이 맑았다. 글을 쓰고 싶다고 한다. 인생 이야기를 풀면 누구나 소설 몇 권은 될 분량이다. 노년에 접어든 여성이라면 질곡은 더 깊고 구구절절 아린 사연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제 그늘막에 앉아 쉬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해보고 싶다고 한다. 지금은 단내 나는 과일을 먹으며 시원한 바람 부는 자연에 묻혀 쉴 수 있으니 이것으로 됐다 싶다며 과거를 곱게 채색하신다.

지지리 궁상인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나 끝탱이라고 불리던 천덕꾸러기를 벗어나 내 삶의 주인공으로 결 고운 무늬를 만들어 온 세월이 존경스럽다. 연약해 보이는 외모 속에 강단이 있어 당신 삶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그녀는 꽃다운 열일곱 나이에 마흔 줄에 접어든 사내의 후처로 보내졌다. 전처 소생 아들 셋에 자기가 낳은 딸 둘, 노망난 시아버지와 머슴 둘이 있는 부농의 집안은 해도해도 끝이 없는 일이 날마다 산더미 같이 쌓여있어 소처럼 일만 했다고 한다. 다정한 부부애도 모르고 뒷간에서 저고리 고름에 눈물을 찍어내며 달보고 별보고 하소연한 세월이 그럭저럭 20년이 흘렀을 무렵, 사는 게 뭔가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잘난 며느리들은 새시어머니를 은근히 업신여기고,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해 선달처럼 살던 남편은 풍 맞아 반신불수가 되고, 도시로 나가 공부하던 막내딸이 교통사고로 죽고. 원망으로 뭉친 가슴은 화병이 돼 몸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아프더란다. 논밭 팔아 한 몫 챙긴 전처 자식들은 효도를 모르고 농사일도 예전처럼 꾸려갈 자신이 없어, 간당간당한 재산을 처분해 무작정 도시 변두리로 나와 산 밑에 터를 잡고 음식점을 열었다고 한다. 일꾼들 밥 해 나르느라고 허리 휘어졌지만 그집 밥 맛있다는 소문은 헛것이 아니라 시골밥상 같은 메뉴가 입소문을 타고 음식점은 날로 번창했다.

딱 20년 지나 손 털고 그때부터 자신을 위해 살기로 작정했다 한다. 벼락같은 성질로 들볶던 남편도 떠나고 하나 남은 딸도 사위와 외국으로 떠나고, 그러더니 데면데면하던 전처소생 아들들이 오히려 속내를 풀어내는 관계가 돼 기른 정을 그리워하더라고 했다. 세월을 살아 인생의 굴곡을 겪고 보니 새어머니의 마음자리를 이해하겠더라며 고마워하더란다. 지난 일 들추어본들 뭐 좋을 게 나오겠느냐며, 이제라도 자식들 마음씀이 이쁘니 내가 감사할 일이지 하신다.

그녀를 만난 건 우연이다. 느릿느릿 힘들게 산을 오르는 내 뒤에서 ‘천천히 오르면 돼요. 쉬엄쉬엄 갑시다’ 하며 내 손을 잡아 이끌어주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휘적휘적 우리는 느린 걸음으로 산길을 걸었고 숨차하는 나를 기다리며 손을 잡아주었다. 천천히 산행을 하면서 그녀는 예사롭지 않은 인생사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당한 설움이 억울할 법도 한데 그녀는 소소한 일상처럼 대수롭지 않게 조근조근 풀어내곤 했다.

그녀가 싸 온 도시락은 소박했지만 정성이 들어있어 맛있었다. 이것도 내 즐거움이니 그냥 맛있게 먹어주기만 하면 되우. 이 나이에 누굴 위해 정성드릴 일이 있다는 게 축복이지 안 그러우? 혹시 부담이라도 가질까봐 미리 선수를 치는 그녀는 고운 미소로 분위기를 이끈다. 나 고단수야, 그냥 늙은이로 봤다간 큰일 나. 그녀의 고단수에 져 주는 척 하며 맛난 음식에 감탄하며 적당한 아부로 감사를 표했다.
용서해 주면 내가 편해, 속에 담아두고 갉지 말아요. 알고 보면 너나 나나 불쌍한 인생인데 뒷담화 하지 말고 그냥 마음 넓게 먹고 품어줘.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게 중요한데, 상대방이 누구이든 희로애락을 풀어내면 맞장구 쳐주고 공감해 줘 봐요. 그러면 묵은 체증 뚫리듯 속이 시원해져서 그이가 선량해진다우.
그녀는 심리상담사도 정신과 의사도 아니고 학식이 높지도 않지만 세상을 소통하며 사는 법을 제대로 아는, 매력있는 분이다. 그녀를 보며 나를 점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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