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크레딧이 올라가자 우르르 성질 급하게 나가는 관객들 틈으로 스크린을 응시하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지막 자막이 올라가고 나면 불이 켜지면서 스크린은 잠시 쉰다. 짧은 몇 분의 시간이다. 다들 바쁜 세상인데, 혼자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거나 흠집을 찾아내려는 평론가이거나 아니면 정말 남아도는 잉여시간을 허비하고자 애를 쓰는 중이거나 이런 이유가 아니다. 크게 감동적이지도 못하고 주는 교훈도 별로이고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닌 요란한 영상과 광고로 낚인 관객들을 대신해 수많은 이름들이 수고한 시간과 노력을 이해하려는 마음에서다.

주연·조연 배우와 감독 외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 한 편을 제작하는 데 참여했다.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역할의 경중을 따지자면 중요한 이, 덜 중요한 이로 나눌 수도 있겠다. 그러나 덜 중요한 누군가가 제 역할을 제대로 했기에 영화는 만들어지고 개봉을 할 수 있었다.
최근 한 단체에서 행사가 있었다. 의료봉사가 주된 목적이었다. 참여한 사람들은 의사·간호사 몇 명 외는 다 의료진과는 무관한 사람들이다. 사전답사를 하고 물품을 준비하고 참가인원 체크를 하고, 작든 크든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핵심 멤버만 열심이었다고 이번 일이 잘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회원이 있어야 임원의 역할이 생기고 빛도 난다. 모두들 자기 시간을 할애해 기쁜 마음으로 봉사에 참여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오늘 행사의 평가를 겸한 참여한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의료진과 후원금을 많이 낸 분들에 대한 치하를 길게 들었다. 좀 지루하다 싶은 시간 동안 수고하셨다, 고맙다, 감사하다는 박수를 열심히 쳤다. 기꺼이 잔심부름을 해 주신 분, 무거운 짐을 나르며 고생한 분, 현장정리에 열심이었던 분, 그도 아니면 행사참여에는 미미한 역할로 존재감이 덜했지만 진료를 받기 위해 온 분들에게 따뜻한 미소로 마음을 열어준 분 등. 소품 같은 역할이지만 정말 최선을 다한 나머지 많은 분들은 뭉뚱그려 넘어갔다. 마음이 가뿐하지 않다. 에나멜 광택처럼 매끈한 진행자의 멘트가 마음까지 울리지를 못했다.

봉사는 내 마음을 진정으로 기꺼이 누군가에게 나누는 일이지 칭찬을 바라거나 대가를 원해 하는 일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도 노곤한 마음으로 돌아왔던 시간이 따분했던 것은 열외에 대한 소외감이다. 물론 나는 한 일에 비해 과분한 인사를 들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그래도 나에게 쏟아진 인사가 그리 탐탁하지 않았다.

아침에 집합했던 장소에 돌아오니 어둠이 내린 시각이다. 저녁을 먹었다. 화기애애한 분들은 여전히 주목받는 그룹이고 나머지 분들은 계면쩍게 자리를 지키면서 분위기 돋우는 분들의 멘트에 박수쳐주고 자축하는 분들의 선창에 건배 잔을 들었다. 계면쩍은 시간이다. 피곤한 표정이 보이고 말이 없어지고 시계를 보는 분도 보인다. 마무리 하는 시간이 왔다. 한마디씩 좋은 말들이 이어졌다. 내 순서다. ‘좋은 일을 하려고 하루 온종일 개인 시간을 희생했다. 내가 주가 아닌 일에 최선을 다해준 분들이 고맙다. 퍼즐조각처럼 모두가 제자리에 있어야 그림이 완성된다. 이분들에게 큰 박수를 쳐드리고 싶다.’ 살짝 분위기 쏴 해질 말이지만 작가라는 이름으로 우대받는 것 같아 민망한 마음에 의도적으로 마무리 인사말을 했다.
주말에 영화 한 편을 봤다. 영화가 끝나고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서 나가기 바쁘다. 마지막 엔딩 자막이 나올 때까지 앉아있으니 아들이 묻는다. “우리만 남았는데 안 일어나세요?” 마지막으로 나온 우리 앞에 그 많은 관객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모두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안내하는 직원도 보이지 않는다. 3D 영화 관람용 안경을 회수 박스에 넣고 우리만 탄 엘리베이터에서 아들에게 말했다. “엔딩크레딧이 영화 진짜 마지막 장면인데 그냥 나오면 영화표 값 아깝잖니.”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