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 심사를 다녀왔다. 현장에서 시제를 발표하고 작품을 받아 심사를 하고 시상식까지 하루 종일 현장에 있었다. 수백 편의 작품을 읽고 심사하는 일이 만만치 않아 눈도 피곤하고 머리도 복잡해지지만 감동을 주는 작품을 만나면 가슴이 출렁이면서 피곤했던 눈도 생기로 빛이 난다.

초·중·고 학생부과 일반부까지 참가 대상이 전 연령대라 작품의 질도 층층이고 출품 작품도 많았다. 청명한 날씨와 상쾌한 바람은 야외에서 글제를 다듬고 작품을 구상해 한 편의 글을 창작하는 데 더없이 감미로운 영감을 주었다. 하루쯤은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나의 내면과 마주하며 선량한 심성을 복원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습관적인 경쟁과 성과물 만들기에 촘촘해진 몸과 마음을 열어 하찮은 노여움이나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바람직한 선함을 깨워보는 시간은 의미있는 휴식이기도 하다.
글쓰기도 학원에서 배운 아이들 글은 진실이 담기지 않고 형식만 배워 기교에 치중해 마음을 울리는 감동이 없어서 안타까웠다. 일반부의 작품은 나이 지긋한 분들의 글이 진솔하고 긴 세월 쌓여진 삶에 대한 관조가 녹아 있어 감동을 주었다. 고만고만한 글들에 힘이 빠져 지쳐있을 무렵에 쿵, 가슴을 우리는 작품을 읽었다. 기교도 부릴 줄 모르는 천진하고 따뜻한 글이 심사위원 모두를 설레게 했다. 만장일치로 뽑힌 아이의 글은 순수함과 착하고 당당한 진솔함까지 초등 2학년다운 맑음으로 감동을 주었다.
아이의 부모는 트럭에 두부를 싣고 다니며 장사를 한다. 노인 분들이 단골이라 원하면 배달도 해드린다. 어느 날, 서구 끝에서 연수동까지 두부 한 모를 배달하고 온 아빠는 엄마와 식탁에 마주앉아 ‘따끈따끈한 두부를 어르신께 갖다드릴 수 있어 내 마음도 따뜻해진다’며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기름 값과 들인 시간을 생각하면 미련한 장사꾼이지만 아빠는 자신이 파는 두부가 어르신에게 행복한 식탁이 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고소하고 따끈따끈한 두부를 받아들고 행복해하는 할머니를 상상하며 나중에 나도 따뜻함을 파는 두부장수가 되겠다는 내용이다. 부모의 선량함이 아이에게도 영향을 줘 온유한 성품이 만들어졌을 것이란 생각에 심사위원인 우리들에게도 그 마음이 전해져 훈훈했다.

백일장 전날은 명사초청 시낭송회가 있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계층의 사람들을 시 낭송자로 모셔 시 읽는 시간을 마련한 행사였다. 그 중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 한 분이 무대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학교를 졸업한지 30년이 흘렀는데 한 번도 시를 읽어 본 적이 없다. 사업은 전쟁과 같다. 상대를 무너뜨리고 이겨서 내 사업을 번창하게 하려면 총 들고 초긴장으로 살고 있어 살벌한 전쟁터다. 그런데 시 낭송을 의뢰받고 시집을 펼쳤더니 휴전한 기분이더라. 나에게 부를 안겨다 주고 성취욕을 만족시켜준 지난 삶이 안쓰러워지면서 마음이 그리 편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도 휴식이 필요하고 진정 즐거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구나. 잠깐 잠깐 짬을 내 펼쳐든 시집이 나를 사색에 잠기게 하고 유순해져 내 본성의 착함에 위안을 받았다. 숭고하고 아름다운 본성을 잃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강하고 흔들림 없는 사업가의 야성이 가끔은 이렇게 무장해제를 해도 전혀 위험하지 않구나. 부러워하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문득 공허하고 무겁고 어두웠던 나를 치유하는 방법이 시를 읽는 시간임을 알았다.’
좋은 글은 사람의 마음에 여유를 주고 아름다운 품성을 회복시켜 준다. 아득바득 치열한 일상에 치여 후순위로 밀려나 있었던 우리 내부의 선함과 따뜻함을 불러와 우리를 위로하고 다독거려 준다. 경쟁으로 말라버린 가슴에 촉촉한 생기로 헛헛한 허기를 채워주는 역할이 문학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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