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을 체결한 을사오적, 김지하의 풍자시 ‘오적’이 있지만 나는 한글을 훼손한 다섯 도적을 선정한 적이 있다. 실제로 한글 오적은 한글 발전에 공이 많은 사람들로서 오적으로 들먹인 것만으로 대노할 독자들이 많으리라. 그러나 백면서생의 논쟁적 문제제기라고 생각하고 참고 읽어주시길 바란다.
한글 오적의 으뜸은 한글 띄어쓰기를 도입한 서재필(徐載弼, Philip Jaisohn, 1864~1951)이다. 우리는 보통 그를 세종 이후 한글을 발전시킨 최대 공로자로 인정하는 분위기인데 나는 그에 반대한다. 그의 공은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해 최초로 한글전용을 주장했고,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 450년 동안 이어쓰기였던 한글을 띄어쓰기로 바꾸어 한글을 더욱 읽기 쉬운 글자로 다듬은 것이다.
하지만 그가 띄어쓰기를 통해 ‘읽기’에서 세운 공(功)보다 ‘쓰기’에서 범한 과(過)가 더 크다는 게 문제다. 그는 영어와 한글의 이질적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영어의 띄어쓰기를 한글에 기계적으로 적용함으로써 한글 쓰기에 엄청난 부작용을 낳았다. 영어는 원래 띄워 쓰는 고립어(孤立語)이기 때문에 미국 초등학교 1학년도 띄어쓰기는 틀리는 법이 없다. 그러나 한글은 원래 붙여 쓰는 교착어(膠着語)인데 강제로 떼어 놓았으니, 대학생들조차도 띄어쓰기 시험에 낙제점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서재필은 1896년 독립신문 창간호에서 떼어 쓰기가 읽기에 쉬운 점을 말한 뒤, 이어쓰기의 단점에 대해 지적했다.

‘한글을 이렇게 떼어 쓴 것은 누구든지 이 신문을 보기 쉽고, 신문 속의 말을 자세히 알아보게 하려는 것이다. -중략- 한글을 알아보기 어려운 것은 말마디를 떼어 쓰지 않고 그저 줄줄 이어 쓰는 까닭에 위에 붙었는지 아래 붙었는지 몰라 몇 번 읽어본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으니…….’
이러한 단점은 고립어인 영어에나 해당하지 교착어인 한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영어로 ‘I read a book’을 붙여 쓰는 순간, ‘Ireadabook’처럼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그러나 한글은 ‘나는책을읽는다.’라고 붙여 써도 주격조사 ‘는’과 목적격조사 ‘을’이 문장을 나누어주기에 읽는 데 크게 지장이 없다. 하지만 교착어인 한글을 띄어쓰기하는 순간, 포스트잇처럼 뗐다 붙였다 하는 복합어와 접사의 수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나 이어야할지 떼어야할지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감히 단언컨대, 한글 띄어쓰기를 정확히 하는 사람은 한글학자와 국문학 박사까지 포함해 대한민국 국민 중에 단 한 명도 없다. 나도 대학에서 한글 맞춤법을 20년 이상 가르치고 있지만, 아직도 ‘데’ ‘바’ ‘뿐’이 언제 붙고 떨어지는지 구별하기 힘들고, ‘옥수수 기름’, ‘조선 호박’, ‘사과 나무’와 같은 복합 명사는 컴퓨터의 도움 없이는 맞춤법의 정오(正誤)를 가릴 재간이 없다.
‘데’ ‘바’ ‘뿐’의 경우, ‘그가 힘들게 오는데’는 붙이고 ‘그가 오는 데 힘들었다.’는 띄운다. ‘가 본바 별로였다’는 붙이고, ‘가본 바에는 물러설 수 없다’는 띄운다. ‘그녀를 좋아할뿐더러’는 붙이고 ‘그녀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는 띄운다. 옥수수기름·조선호박·사과나무는 붙여 써야 하고 띄워 쓰는 순간 컴퓨터에 붉은 줄이 그어진다.
서재필은 1890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할 때 이름을 Philip Jaisohn으로 개명했고, 독립신문을 발간할 때 영문판 독립신문(The Independent)도 동시에 발간했다. 미완성으로 끝나긴 했지만 영한사전을 편찬하기도 했던 그는 영어의 계몽적이고 보편적인 역할에 감명 받았던 듯하다. 그래서 그가 영어식 띄어쓰기를 한글에 도입할 때 쓰기의 부작용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오직 백성들에게 쉽게 읽히겠다는 계몽적 정신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붙여 쓰면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처럼 돼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는지 가방에 들어가는지 헷갈리지 않느냐고 걱정한다. 그런데 누가 아버지가 가방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겠는가. 난 폰 문자만를 보낼 때만은 붙여 쓰기를 고집했는데 지금까지 단 한 통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답장을 받아본 적이 없다. 한글과 같은 교착어인 일본어와 터키어는 이어쓰기가 원칙이고, 고립어인 중국어조차도 이어쓰기를 한다. 정 읽기 힘들다면 찌아찌아족에 수출한 한글처럼 문장과 문장은 떼고, 주어부·술어부·목적어부로 크게 나누어 덩어리 띄어쓰기를 하면 된다.
그러니 세종대왕 때부터 450년 동안 잘 붙여 쓰고 있는 한글을 갈가리 찢어놓아 국민 모두를 바보로 만든 서재필이야말로 한글 오적의 으뜸이 아니겠는가. 참고로 ‘붙여 쓰기’는 붙여 쓰면 틀리고, ‘띄어쓰기’는 띄어  쓰면 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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