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길이 있습니다. 작은 꼬마가 폴짝폴짝 걸어오고 있습니다. 아이가 커 가면서 나무가 자라고 새들이 찾아옵니다. 작은 벌레도 들짐승도 찾아옵니다. 희미한 자취로 있던 길이 점점 또렷해집니다. 이따금씩 바람이 불고 비도 내립니다. 졸졸 개울물이 흐르고 눈 맑은 가재가 찾아옵니다. 비쳐드는 햇살이 온화합니다.
길은 넓어지고 주변의 나무와 풀이 무성해집니다. 사람들이 드나듭니다. 나무와 풀들이 때맞춰 꽃을 피웁니다. 종종 소란스러운 때도 있습니다. 아이는 자라나 성인이 되고 까진 무르팍 흉터와 무지개를 품은 가슴이 희망과 열정의 두 계절을 건넜습니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혈육으로 뻗은 가지에 새순이 돋고 책임의 무게에 헐떡이기도 하지만 울컥 차오르는 행복과 일에 대한 성취가 활력을 불러오고 힘을 줍니다.

늦가을입니다. 자연은 제 고유의 색으로 산야를 물들이고 품은 씨앗을 잘 익혀 단단한 결실을 만들었습니다. 당신, 중후한 풍채는 세월을 이겨낸 선물입니다. 거칠어진 살갗이 풍상의 세월을 대변하고 굵은 주름은 강팍을 견뎌낸 흔적입니다. 그래도 당신의 미소가 온화합니다. 삶을 응시하는 시야가 넓고 깊어, 사람도 시간도 아우르며 두루 더듬는 눈길에 진한 인내가 배어 있습니다. 겨울이 찾아옵니다. 갈무리한 세월이 겨울 양식이 되었습니다. 꺼내 볼 세월이 다양해 긴 겨울밤이 지루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제 내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민들레 홀씨처럼 아이들은 제 터전을 일구기 위해 떠납니다. 가볍게 날아올라 바람을 타고 넓은 세상에 안착하기를 바라면서도 아쉬움 없이 슬하를 떠나는 모습에 가슴이 허전해집니다.지난날을 돌아봅니다. 나도 그랬었나?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회한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와 코끝이 찡해옵니다. 효자라는 칭송에 따져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순진하게 승차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당연하다 싶은 효심이 이기적이었구나. 늙은 아내의 뭉툭해진 손가락이 안쓰러워집니다.
젊은 축에 낀다고 우겨보던 회갑은 가족끼리 한 끼 식사로 대신했습니다. 아직 정년이 남은 직장이 있고 다리도 튼튼했습니다. 세월은 유수같다더니 순식간에 칠순이 되었습니다. 은퇴를 하고 잠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시간은 늘 남아돌았습니다. 늙은 아내는 아픕니다. 어른 모시고 집안 대소사에 물마를 틈이 없던 시절 다 보내고 이제 쉴 만하니 정작 긴 병에 힘겨운 사투를 합니다. 가장 가까이, 가장 소중한, 내 반쪽이라는 말이 가슴에 징으로 쪼아 새기듯 아프고 선명해집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 했습니다. 그러네요. ‘걱정마라. 곧 나을 병도 아니니 니들 일에 충실하라’ 했지만 띄엄띄엄 길어지는 간격에 서운해집니다. 눈 뜨면 아내의 병상에 가서 온갖 이쁜 말로 재롱(?)를 부립니다. 민망해진 며느리와 자식들이 돌아서 웃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참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입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요양원으로 모시자는 의논이 오고갑니다.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나와 아내의 일로 자식들에게 천둥 친 일은 맹세코 처음입니다.
오늘, 팔순을 맞았습니다. 세월은 정직하게 요령 피우지 않고 따박따박 걸어옵니다. 어눌한 말투를 후유증으로 아내는 건강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나도 무릎에 힘이 빠져 노인이 되었지만 감사합니다. 이만하면 잘 살았다 싶습니다. 조촐하게 내 형제 자식들만 불러 밥 한 끼 먹고 싶었습니다. 무학의 소작농 자식이라 가난과 친숙한 세월이었지만 공부할 수 있고 건강하게 살았으니 축복이 따로 있나 생각합니다. 다만 상냥하고 인정 많은 누이가 일찍 생을 마감한 것이 가슴 아픕니다. 월명사의 ‘제망매가’의 가슴저린 슬픔이 내 것 같아 술의 힘을 빌려 목청껏 울었습니다. 그것마저도 이제는 편안히 받아들입니다.
큰 애가 마이크를 잡더니 아버지 인생을 칭송합니다. 민망하지만 터무니없는 허풍도 아니란 생각이 슬며시 듭니다. 이만하면 잘 살았다 싶습니다. 허망한 일도 가슴아픈 일도 있었지만 좋은 일,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격스러운 일이 더 많이 떠오릅니다. 80수를 살아온 세월, 걸음도 말투도 어눌한 늙은 아내의 손을 잡고 저 생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욕심없이 천천히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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