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남긴 기록이 사라지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자연적인 요인이고, 둘째는 인위적인 요인이다. 홍수로 물에 잠기거나 오랜 시간이 지나며 기록매체인 종이나 비단이 손상되는 것이다(보통 종이는 1천 년, 비단은 500년을 간다고 한다). 전쟁·절도·화재 등으로 기록이 손실되는 경우도 있다. 몇 년 전 유네스코와 ICA(국제기록평의회)에서는 미군의 이라크 침공 당시 바그다드에 있던 박물관을 공습해 문화유산과 기록을 파괴한 데 대해 성명을 발표한 적도 있듯이, 기록 손실의 자연적 요인과 인위적 요인 중 나는 인위적 손실이 훨씬 크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지금 우리는 임진왜란으로 실록을 편찬할 사료(史料)를 대거 손실한 상황에 더해 이러저러한 정치적 사건으로 실록 편찬이 늦어지고 있는 광해군 초반의 실록 편찬 상황을 돌아보고 있는 중이다. 그 일환으로 실록 편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일반적인 실록 편찬과정과 14개 조항의 편찬범례를 소개한 바 있다.

  실록청의 편찬 대책

   
 

임해군 옥사, 유영경 퇴출 등의 정치적 사건에 때문에 졸곡(卒哭) 후에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해 편찬해야 하는 실록이 순서에서 뒤로 밀렸다. 광해군이 즉위한 지 1년 반이 지나서야 춘추관에서 실록청 설치를 주문했던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 원년 10월이 돼 부족한 실록 편찬 자료를 수집할 방안을 마련해 시행했음을 살펴봤다.

실록청 운영에도 뭔가의 대책이 필요했다. 실록청에서는 원활한 편찬을 위해 두 가지를 건의했다. 첫째는 서고(書庫)를 열고 닫을 때 규칙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낭청의 임용에 대한 것이었다. 서고를 여닫는 것이 무슨 문제일까 싶은 분들을 위해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실록청에서는 “원래 춘추관에 보관돼 있는 시정기(時政記)는 반드시 사관 3명을 갖춘 연후라야 여닫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나로서는 이 근거를 확인할 수 없었다. 한림(翰林)이라고 불리는 전임사관(專任史官)이 아니면 궁중에 있는 춘추관 서고는 물론 지방의 사고(史庫)를 열 수 없다는 것은 기록에 자주 보이는 규칙이지만, 사관 3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잘 모르는 일이다. 혹시 궁중의 춘추관에만 그런 규칙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거기는 사관들의 사무실이니까 자연스럽게 그런 관례가 생겼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실록청에서는 춘추관과는 달리 ‘한림은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겸춘추(兼春秋)로서 정원을 갖추어 여닫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3방 체제도 갖추지 못하다
한편, 실록청을 개설한 뒤 낭청이 부족했다. 원래 실록청 낭청은 모두 12명인데 그 4명은 임명하지 않았고 2명은 지방에 있으며 기타 더러는 입번하고 더러는 신병으로 정고해 사진(仕進)한 인원이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는 예상할 수 있는 문제점이었다. 평상시 사초를 작성하고 타 관청의 공문서를 받아 보관하는 전임사관과는 달리 실록청 사관은 실록 편찬을 위해 임시로 차출된 관원들이었다. 이들 임시 관원을 겸춘추(兼春秋)라고 불렀는데, 여기에 구조적인 약점이 있었다.

임시 관원인 만큼 그들은 본래 본직이 있었다. 그러므로 인사 이동이나 업무의 우선순위에서 자신이 속한 관청의 일이 우선이게 마련이었다. 물론 겸춘추는 묘비(墓碑)에 반드시 그 경력을 기록하는 청직(淸職)이었고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럼에도 관료제의 운영에서 겸직은 본직보다 우월할 수 없었다. 이 문제가 잘 정리되지 않아서 그런지 이 무렵 실록 편찬은 옆에서 보기에도 민망했던 모양이다. 광해군 2년 3월 사헌부 지평 이명(李溟)은 다음과 같은 계(啓)를 올렸다.
“선조(先朝)의 《실록》을 편찬하는 것은 그 일이 막중하니 1, 2개월에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한두 사람이 첨삭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반드시 모두 모여 앉아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고 잘 헤아려서 첨삭을 가한 뒤에야 거의 지연되고 누락되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실록청에 당상관 10명과 낭청 12명을 두었으니 적은 관원이 아니고, 지난해 11월부터 일을 시작해 금일에 이르렀으니 짧은 세월이 아닌데, 실록청을 설치한 후로 3방(三房)을 통틀어 일제히 모인 적이 없었고 한 달에 준례로 모이는 것도 몇 번이 없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출근하는 날에도 1방(一房)의 상하 관원 각 1명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의논하지도 않고 그대로 두거나 삭제해 임의대로 붓을 대다 보니, 편찬이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을 뿐만 아니라 편찬 원칙에도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래서 일단 출결단자(出缺單子)를 써서 근무상황부터 체크하기로 했다.

   총재관, 산삭(刪削)과 취사(取捨)의 총괄
실록청을 3방으로 나누는 관례는 대개 조선초기 문종 무렵으로 추정된다. 3방을 지휘하는 도청(都廳 都는 우두머리라는 뜻. 즉 본부)이 있으니까 실은 편찬팀은 모두 4팀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당상과 낭청을 각각 3방(三房)으로 나누고 매 방마다 당상과 낭청이 정사(政事) 기록을 살펴보고 그다지 긴요하지 않은 부분을 삭제해 초안을 작성하고 나면, 도청(都廳) 당상이 그것을 고증(考證)하고 총재(總裁)와 대신이 다시 여러 당상관과 함께 편찬하는 프로세스를 거치게 돼 있었다.
이 전체를 책임지는 관원이 총재관이며, 영의정 등이 맡고 춘추관 직책으로는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나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된다. 그러나 실제로 편찬을 지휘하는 것은 대개 예조판서나 대제학이 맡는데, 이들은 춘추관 직제로는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맡는다. 조선시대에는 대제학이 예조판서를 겸임하는 경우도 많았고, 지춘추관사는 그때그때 학문, 특히 역사에 대한 식견을 인정받은 인물이 선임됐다.
그런데 도청에서 이뤄지는 총괄 및 조정 과정에서 업무에 부하가 걸렸던 듯하다. 예조판서 이정귀(李廷龜·1564~1635)는 “신이 문형(文衡·대제학)의 직분을 갖고 도청 당상에 차임되었습니다만, 대개 문사(文辭)를 윤색하여 일대(一代)의 완전한 사서(史書)를 만드는 일은 졸렬한 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 그러나 근자에 조가(朝家·조정)에 중대한 예(禮)가 계속되어 신의 본직에 일이 많아져 여가를 낼

   
 
겨를이 없고, 또 각방의 찬수가 끝나야 일을 사직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이 그 사이에서 감히 손을 댈 수 없습니다. … 더구나 세 방에서 찬수한 것이 많은 양의 권질이어서 한 사람이 겸직으로 담당하기엔 힘과 정신이 따라가지 못하고 질병과 사고도 생기기 마련입니다.”라고 애로점을 토로했다.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와 상촌(象村) 신흠(申欽)
이정귀의 요청에 따라 함께 감수를 맡을 인물을 뽑았는데, 그가 제학(提學) 신흠(申欽·1566~1628)이었다. 이 두 학자에 대해서는 우리의 주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두 학자는 조선 중기 문장으로 뛰어난 4대가(大家)로 꼽힌다. 4대가란 이 두 분에, 계곡(溪谷) 장유(張維·1587~1638)와 택당(澤堂) 이식(李植·1584~1647)을 더해 부르는 이름이다.

광해군 원년 10월 일실된 사료를 모아 실록 편찬을 시작할 당시 총재관(總裁官)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이었다. 그리고 이정귀가 광해군 3년 11월에 대제학이 됐고 이정귀의 건의로 신흠이 합류했으니 실록 편찬의 진용은 이항복-이정귀-신흠이라는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관료로 짜인 것이었다. 이런 인연인지 이정귀는 후일 이항복을 “그가 관작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이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항복은 광해군 5년 김제남의 옥사와 연루돼 인재천거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한직(閒職)인 중추부로 옮겼다가 광해군 9년(1617)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데 반대하다가 함경도 북청에 유배됐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 이정귀와 신흠 역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했다는 박응서 등의 역모사건과 이어진 김제남 옥사에 연루돼 파직되었다가, 이정귀는 광해군 13년 외교문서를 담당할 전문가가 없자 다시 등용됐고 신흠 역시 파직돼 광해군 9년 1월에 춘천(春川)으로 유배당했다가 인조반정으로 맞았다. 이항복-이정귀-신흠으로 구성된 실록편찬 라인을 대체한 것은 이이첨이었다. 그는 김제남 옥사의 와중이었던 광해군 5년 8월 예조판서 겸 대제학을 맡아 실록 편찬을 주도했다. <계속>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