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초반의 정부(政府), 그때 말로 하면 조정(朝廷)은 북인이 중심이기는 했지만 서인·남인이 함께 공존하는 형국이었다. 그렇지만 소북(小北)이 약해지고 몇몇 옥사가 진행되면서 서인과 남인은 자의든 타의든 조정을 떠나야 했다. 그 결정적 계기가 영창대군을 귀양 보내 죽게 하고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에게 사약을 내렸던 계축옥사였다. 원래 정치세력은 자신들이 대변하는 계층, 계급의 이해를 위해 각축을 벌이기도 하고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비전을 놓고 다투고 배제하기도 하는 법이다. 광해군을 비롯한 정치세력들이 가지고 있던 ‘정책적 비전’(넓은 의미의)에 대해 대동법을 통해 중요한 일부를 다룬 적이 있지만, 앞으로 장(章)을 달리해 더 다룰 예정이다. 아무튼 계축옥사를 계기로 이항복-이정귀-신흠으로 구성된 실록편찬 라인은 이이첨 중심으로 대체됐다. 이이첨은 광해군 5년 8월 예조판서 겸 대제학을 맡아 실록 편찬을 주도했다. 다시 광해군대 실록편찬 과정으로 돌아가보자.

   
 

 선조 23년? 24년?
역시 문제는 실록을 편찬할 사료의 부족이었다. 광해군 2년 11월 6일, 홍문관 관원 서경우(徐景雨)는 임진년 이전 20여 년의 사적(事迹)이 모두 병란 중에 없어져 장차 전해지지 않고 소멸될 형편에 놓여 있는데 묘당(廟堂·비변사)에서 어떻게 조처할지 모르겠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특히 기축·경인·신묘 3년간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신빙할 만한 글이 없다고 했다. 그가 말한 기축·경인·신묘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촉발된 기축옥사를 가리키며, 이 옥사는 기축년(1589, 선조 22년)부터 시작해 경인년(1590), 신묘년(1591)년까지 계속됐다.

통상 역옥(逆獄)에는 억울한 경우도 생기고 실제 이상으로 확대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최영경(崔永慶) 등 특히 억울하게 죽은 선비나 백성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후유증도 컸고, 당사자들끼리 오래 상처로 남았다. 관동별곡(關東別曲)·사미인가(思美人歌) 등 아름다운 가사 문학을 남긴 송강 정철(鄭澈)은 이 사건 초기에 위관(委官·심문책임자)을 맡았다가 나중에 혹형(酷刑)의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가야 했고, 경륜있는 정승으로 정철에 이어 위관을 맡았던 서애 유성룡(柳成龍) 역시 이발(李潑)의 노모와 자식을 죽게 내버려뒀다는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데 당시 자료가 없다 보니 추옥(推獄)의 전말과 난을 평정한 실상에 대해 뒷사람들이 정확하게 시비를 가릴 줄 모른다는 것이다. 겨우 20여 년이 지났지만 입으로 전해지고 귀로 듣는 것이 각자 달랐던 것이다. 근년에 들어와서는 더할 수 없이 논의가 분분해지고 있었다(이 문제는 이발 노모와 어린 자식이 옥중에서 죽은 것이 언제인가의 논란이다. 핵심은 정철이 위관을 맡았던 선조 23년인가, 유성룡이 위관을 맡았던 24년인가 인데 결론은 선조 24년, 유성룡이 위관일 때였다. 그러나 광해군 당시에는 즉위년에 의금부 경력 나덕윤(羅德潤)이 정철이 위관으로 이발 노모를 죽게 했다고 상소하면서 그 시기가 논란이 됐

   
 
다. 같은 즉위년 광주 목사(廣州牧使) 신응구(申應 矩밑木)가 상소에는 이발 노모의 죽음이 정철이 위관에서 물러난 뒤라고 했는데, 광해군 원년 12월 정철의 아들 정종명(鄭宗溟)이 상소를 올려 정철이 이발 노모의 죽음과 상관이 없음을 해명했다.

 구술사(口述史)의 영역
아무튼 임진왜란 이전의 편찬 자료가 없다 보니 실록청에서는 임진왜란 이후의 사적을 먼저 수정하고 왜란 이전의 일은 놔둔 채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기축·경인 연간에 국청(鞫廳)에 참여한 신하들에게 따로 문견(聞見)을 받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다 보면 구신(舊臣)이 점차 세상을 뜰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요즘 구술사(口述史·Oral Hiatory)를 연상시킨다. 역사자료가 문서로 잘 남아 있으면 모르지만 전쟁·정변 등으로 없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또 애당초 문서로 남지 않는 역사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겪는 역사의 격동뿐 아니라 일상 생활도 그렇다. 오히려 일상은 친숙하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그 익숙한 일상이 후세 사람들에게는 전혀 낯선 것이 된다. 이때 기록으로 남지 않은 역사를 복원하는 유력한 방법이 구술사, 즉 당시 살았던 사람 중에 지금까지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과 증언에 의지해 역사를 복원하는 방법이다.
2004년 발족한 국무총리실 소속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당시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들 중 생존자를 찾아 인터뷰를 하고 그걸 기록으로 남겨 편찬했다. 이런 방식은 가족사에도 쉽게 적용할 수 있다. 할아버지·할머니에게 과거 당신들이 살아온 삶을 말씀하시도록 하고 녹음해 보존하는 것이다. 우리집에서도 이 얘기를 했더니, 작은 녀석이 할머니에게 어렸을 때 황해도 연백에 사시던 얘기, 학교 다니던 얘기, 피난 나온 얘기를 녹음하고 일부는 노트에 정리했다. 즐거웠던 아팠던, 소중한 기억들이 사라지기 전에 한 번 시도해 보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독촉은 하지만
결국 자료가 없어 임진왜란 이전보다 이후를 먼저 편찬하게 되었는데 광해군도 그 진도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왜란 이후의 사실이나마 제대로 편찬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정귀는 “3개 방(房)으로 나누어 하고 있는데 신과 신흠(申欽)이 교정하며 찬수하는 것은 중초(中草)입니다. 그런데 신 역시 일이 많아 날마다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찬수한 것이 겨우 임진·계사년 당시의 일에 머무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임진년 이후부터 먼저 착수하기로 했지만 임진년과 계사년의 두 해에 대한 중초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 이정귀의 보고였다.

   
 

해가 바뀌어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듬해인 광해군 3년 3월에 사헌부가 나섰다. 사헌부에서는 “실록청에 부서를 설치한 지 이제 벌써 두 해가 지났습니다만, 공역(功役)은 막막하기만 합니다. 이대로 둔다면 비록 10년이 지나더라도 결코 일의 완성을 기약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당상과 낭청이 돌아가면서 숙직하여 편찬한다는 사항을 작년 9월에 대관(臺官)이 논계하여 윤허를 받았으나, 아직도 거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자못 온당하지 않습니다.”라고 실록청을 비판했다. 아울러 실록청에 직숙하는 관원은 자기 본직인 본사에서의 업무나 상직(上直·숙직) 및 조가(朝家)의 거동과 모든 공적인 업무로 빠지지 못하도록 근무 규정을 정하자고 했다.

 실록청의 운영 개선안
이에 대해 실록청에서 운영 개선안을 제출했다. “본청에서 다음과 같이 정식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 이미 3방으로 나누어져 있으니 4월 1일부터 시작하여 한 방마다 매일 당상 한 명과 낭청 두 명이 4일 분의 일을 완수하게 한다. 그러면 한 방의 당상 세 명이 한 달에 각각 열흘씩 근무하여 한 명이 40일 분을 편찬하게 되니, 한 달에 세 명이 편찬한 것을 통산하면 120일 분의 일을 마치게 되고 세 방에서 매달 편찬한 것을 통산하면 모두 360일 분의 일을 마치게 된다. 이렇게 계산하여 나간다면 1년에 편찬할 것이 매우 신속하게 처리될 것이다. 이처럼 격식을 정해 놓고 그날그날의 〈출결〉 단자 외에 매달 말에 당상과 낭청 각원의 이름 아래에 각각 한 달에 정해진 40일 분을 편찬했는지 안 했는지를 쓰고, 정해진 양대로 편찬하지 못한 사람은 각각 그 이름 아래에 며칠 분을 편찬하지 못했는지를 써서 그것을 근거로 실적을 고과한다.”
날짜별로 책임량을 정하고 편찬 실적에 따른 점수를 매겨 고과에 반영한다는 것이 골자다. 그런데 원래 실록청은 겸임으로 돼 있기 때문에 실록청에 임명되더라도 본청의 직무가 우선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본청의 인사(人事)에 따라 관직 변동이 생기면 실록청을 제쳐두고 본청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실록청의 인사 상황은 시기에 따라 다르고 아직 연구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간단히 말할 수는 없으나, 실록청에 임명되는 것은 묘표(墓表)나 묘지명(墓誌銘)에 꼭 기록되는 영광이면서 한편으로 겸임직이자 사료 산삭(刪削) 자체가 힘들고 피곤한 일이라는 인식으로 겸춘추 직무를 회피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조정 관리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광해군 3년 7월 사간원의 비판도 그 연장에 있다. 실록청 관원은 신중히 선발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비판이었다. “낭청 심언명(沈彦明)·황기(黃沂)·이경운(李卿雲)은 인망에 맞지 않고 박홍도(朴弘道)는 종반(從班)을 거치지 않았으니, 모두 개차하도록 명령하라.”는 것이 요지였다. 낭청은 실록청에서 직접 사료를 선별하고 옮겨 적는 일을 담당하는 실무진이었다. 낭청이 비면 바로 충원해야 했는데, 그 충원한 사람들의 자질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박홍도가 지적받은 ‘종반’은 ‘시종(侍從)의 반열’이란 뜻인데 시종은 임금 가까이에 있는 신하, 즉 홍문관·예문관·승정원 같은 관청 출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실록청에 참여하는 겸춘추가 되려면 인망과 근시(近侍)라는 관력이 따라야 했다는 점을 보여 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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