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편찬이 지지부진했던 이유로 첫째, 임진왜란으로 인한 자료의 유실을 들었다. 둘째, 편찬에 참여하는 관료들의 불성실성이 있었다. 사실 둘째 요인은 어느 시대에나 다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광해군대 실록 편찬이 늦어지는 데 대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다만, 경연과 마찬가지로 계속되는 옥사(獄事)와 연관이 있다면 광해군대의 특수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연관은 사실이었다. 셋째, 광해군 5년 계축옥사는 다른 정치세력을 조정에서 배제함으로써 인재의 부족을 낳았고 이는 당연히 실록 편찬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제 광해군 중후반 시대의 실록 편찬과 그 결과를 살펴보면서 ‘기억을 조작하는 사람들’을 가름하기로 하겠다.

   
 

  # 재촉하고 재촉하지만
광해군도 실록 편찬의 관례와 의미를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표시했다. 광해군 3년 9월에 “실록청이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의 일기(日記)를 가져다가 아울러 찬차(撰次)에 넣는다고 하는데, 임진년 이후의 기사는 소루하고 잘못된 데가 틀림없이 많을 것이니, 대신과 총재관이 십분 상세히 살펴 그 믿을 만한 것만 정하게 뽑아서 쓰도록 하고 와전됨이 없도록 하라.”고 해 실록이 제대로 편찬될 수 있도록 마음을 썼다. 해가 지나 광해군 4년 5월에도 실록 편찬이 하루가 급하다고 재촉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조시대 선왕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실록 편찬은 기록관리라는 1차 실용성 외에 선례가 있는 행위를 스스로 수행함으로써 정통성을 갖는 상징성, 즉 2차 실용성의 의미도 컸다. 그러므로 실록 편찬이 지지부진하다는 것은 국왕으로서도 그리 탐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지지부진한 상황 자체가 조정의 삐걱거림을 보여 준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인정하기 싫었겠지만.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광해군의 반응은 다소 신경질적인 느낌을 줬다. 광해군 6년(1614) 1월 광해군은 “실록을 편집하는 일에 있어 허송세월만 하는 것이 실로 심하여 그 일이 언제 끝날지 기한이 없으니 대신은 특별히 더욱 엄하게 독책해서 속히 완료하도록 하라.”고 다그쳤다.
 
 # 7년 동안 인출(印出)한 것은?
답답한 것은 실록청도 마찬가지였다. 광해군 7년 실록청(實錄廳)이 아뢰기를 “실록청을 설치한 지 7년이 지났는데 아직 한 장도 인출하지 못하고 있으니 사체의 미안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앞서는 각방의 당상 9원, 낭청 18원 외에 또 대제학과 다른 1원이 도청(都廳)이 되고, 낭청 3원이 총재관(摠裁官)과 협동하여 감정 인출하였다고 하는데 오늘은 실록을 고출(考出)할 때 오직 동지춘추 남이공(南以恭)·박건(朴楗)만이 와서 참여했습니다. 전 대제학 이정귀(李廷龜)가 계청하여 도청 3원을 더 내기로 윤허를 받았

   
 
으나 감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대제학으로 하여금 전일의 계사를 상고하여 빠른 기일 내에 완료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실록청의 입장에서도 민망했으리라. 그런데 이렇게 된 데에는 계속된 옥사의 영향이 컸다. 계축옥사를 기점으로 서인과 남인은 조정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실록청에서 말한 ‘전 대제학 이정귀’도 조정을 떠난 사람이었다. 실록청의 보고에 광해군이 ‘따랐다[從之]’고 했지만, 따르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광해군이 할 수 있는 일은 재촉하는 일뿐이었다. 광해군 7년 8월에도 “실록청과 찬집청(纂集廳)의 일이 어느 해에 끝나겠는가? 살펴서 아뢰라.”고 했다. 참고로 찬집청은 실록청 업무 프로세스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부서다.

 # 《선조실록》이 완성되다
광해군 8년 11월 드디어 실록이 완성됐다. 실록청은 “선종 대왕(宣宗大王)의 실록을 봉안(奉安)하는 일 및 세초(洗草)하는 일 등의 절목(節目)을 마련하여 계목(啓目) 뒤에다 기록하였습니다. 각 해사(該司)로 하여금 이것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할 일로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보고했다. 우리는 통상 ‘선조(宣祖)’라고 하지만, 선조의 묘호는 원래 ‘선종(宣宗)’이었다. 그러다가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李仁任)의 자손이라는 명나라 《대명회전(大明會典)》의 기록을 바로잡은 종계변무(宗系辨誣), 임진왜란의 극복을 이유로 ‘선조’로 바뀐 것이 광해군 8년 5월이었다.
그러니까 실록 명칭도 ‘선조대왕실록’이어야 하는데 그해 11월에 편찬된 실록에는 ‘선종대왕실록’으로 돼 있다. 이는 아마 이미 활자로 인쇄했기 때문에 굳이 수정하지 않고 놔둔 듯하다. 다시 찍으려면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실록이 완성되면 편찬에 사용된 사초(史草) 등을 자하문 밖 세검정에서 물에 씻어 비밀을 보장하고 또 재생용지로 쓴다. 동시에 편찬에 수고한 신하들을 위로하는 잔치인 세초연도 열어 준다. 이와 함께 실록을 춘추관을 비롯한 각처의 지방 사고(史庫)에 봉안(奉安)한다. ‘봉안’은 ‘받들어 모신다’는 뜻으로, 실록의 위상을 용어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선조실록》은 편찬만이 아니라 봉안도 늦어졌다. 편찬이 끝난 지 반년이 지난 광해군 9년 4월, 사간원에서는 “실록을 나누어 보관하는 것은 사체가 중대하여서 봉안하는 거조를 조금이라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삼가 본청에서 택일(擇日)한 단자(單子)에 대한 전하의 결정문에 보건대 ‘장마철이 멀지 않았고 나라에도 일이 많으니 8월 중으로 고쳐 택일해 봉안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설령 장마가 지더라도 궤속에 넣고 단단하게 봉하면 습기가 스며들 걱정은 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라에 요즈음 일이 많지 않은데, 사신을 보내어 봉안함에 있어서 무슨 방해되는 것이 있어서 다시 여러 달을 지연시킨단 말입니

   
 
까. 사체로 살펴볼 때 몹시 온당치 않습니다. 강원도·경상도·평안도 등에 실록을 봉안하는 것을 경기에 봉안한 예에 의거해서 속히 날짜를 가려 한꺼번에 시행하소서.”라고 했다.

 # 봉안(奉安)조차 늦어진 실록
사간원의 의견에 대해 광해군은 그렇게 하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실록청에 대한 선온(宣 酉+삼수 뺀 溫), 즉 ‘술을 베푼다’는 뜻으로 바로 세초연을 베푸는 일이 광해군 9년 9월이나 돼 정해졌다.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바로 편찬이 끝난 광해군 8년부터 이렇게 자꾸 봉안·세초 기일이 지체되는 시기에 바로 당시 서궁(西宮)에 유폐돼 있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론(廢位論)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인목대비의 폐위가 있기 전에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인 김제남에 대한 추형(追刑), 즉 부관참시가 있었다. 광해군 8년 7월이었다. 그때 사관은 “김제남을 추형한 것은 실로 모후(母后)를 폐할 조짐이었다. 며칠 동안 신하들이 아뢰자, 바로 따랐다.”라고 썼다. 정확했다.

폐모가 과연 조선 백성들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광해군은 폐모의 근거를 위해 조선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여론조사를 수행했다. 조정의 신료와 종친은 물론 한양의 각 방(坊) 노인들, 퇴직관료들, 하급 무관에 이르기까지 ‘수의(收議)’라 불리는 의견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서 폐모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반대하는 의견을 낸 사람들은 조정을 떠나야 했다. 이항복, 오윤겸 등이 그들이었다.

광해군 10년 4월 실록청에서는 “옛날 승문원 자리에 현재 찬집청이 설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각청(各廳)의 방사(房舍)에 비어 있는 곳이 많다 하니, 호위대장을 그곳에 입직시키라고 전교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조(先朝) 때 각 지역에 미처 나누어 보관하지 못한 실록들을 현재 본청에 봉안(奉安) 중이고, 세초 문서(洗草文書) 역시 그대로 보관하면서 아직까지 처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찬집청이 한쪽 구석에 설치된 것만도 구차스러운 일인데 비사(示+必 史)가 소장되어 있는 곳에 군대를 거느린 대장을 함께 있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다. 아마 이때까지 《선조실록》을 봉안하지 못했고 세초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초는 다음 달인 5월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때 ‘서쪽 변방에 이미 우려할 만한 사단(事端)’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후금과 명, 조선의 숙명적인 전쟁의 서막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선조실록》은 참으로 편찬에 오랜 시간을 보내고 광해군 10년 7월에 지방 4사고에 봉안되었다. 실록청이 “《선조대왕실록(宣祖大王實錄)》을 4도에 분장하는 일을 7월 보름 후로 택일하여 계하하였으니, 봉안사 한 사람씩 마땅히 나누어 보내야 합니다. 본청 당상 네 사람 가운데 지사 한 사람이 아직 차출되지 않았고 동지사 이경전(李慶全)은 사신으로 나갔고 다만 지사 이이첨(李爾瞻), 동지사 유경종(柳慶宗)이 있으나, 이첨은 약방 제조로서 외지로 나갈 수 없습니다. 혹 겸관을 파견하는 것도 무방합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라고 한 것이 최종 보고였다.
그런데 《선조실록》은 늦어진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실록의 내용,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선조실록》을 수정해야 한다는 논의로 이어졌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기에 수정 논의가 나온 것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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