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편찬을 마치고 베푼 세초연이 광해군 9년 9월로 정해졌다. 원래 실록 편찬은 8년에 마쳤는데, 그때부터 서궁(西宮)에 유폐돼 있었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론(廢位論)이 전개됐고, 인목대비의 폐위가 있기 전에 친정아버지인 김제남에 대한 추형(追刑), 즉 부관참시가 있었다. 광해군 8년 7월이었다. 편찬이

   
 
늦어진 실록은 각 사고(史庫)로 옮겨 보관하는 절차인 봉안(奉安)도 늦었다. 국제적으로는 이 무렵 북쪽 요동의 상황이 불안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인목대비 폐위와 후금과의 전쟁은 따로 다룰 것이다. 이제 《선조실록》 편찬을 둘러싼 마지막 문제를 다뤄 보자.

 실록의 수정에 대한 편견
엄밀히 말해 《선조실록》은 늦어진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실록의 내용,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선조실록》이 편찬된 뒤 광해군 때는 당연히 그 공정성에 대한 의문도 잠재해 있었을 뿐이고, 또 드러났다 해도 바로잡을 의지도 경황도 없었다. 《선조실록》에 대한 수정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계해반정으로 정권이 바뀐 뒤의 일이다.

사실 이미 편찬된 실록의 수정은 《선조실록》이 처음은 아니었다. 조선초 《태조실록》이 세종대 후반에 이르러 수정됐던 적이 있었다. 건국 초기의 정보가 부족한 것을 보완한다는 게 취지였지만, 실제로는 건국 과정의 합리화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한 번 편찬된 실록이 다시 수정된 경우는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선조실록》의 수정은 무엇보다 인상이 좋지 않다. 손을 댄 실록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거시적으로는 조선이 식민지로 귀결됐다는 역사적 현실, 미시적으로는 일제시대 이후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인조반정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맞물리면서 《선조실록》의 수정은 ‘선조(宣祖) 이래 격렬한 당쟁(黨爭)의 결과’라는 뻔한 ‘해석’에 그쳤다. 하지만 그렇게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공정성에 대한 문제 제기
《선조실록》 수정은 비록 인조 원년에 수정 논의가 처음 제기됐지만 나라 안팎의 사정으로 계속 중단되다가 효종 8년(1657)에 이르러 마무리됐다. 인조 원년 8월 경연 석상에서 특진관 이수광(李 目+卒 光), 이정구(李廷龜) 및 임숙영(任叔英) 등은 《선조실록》이 ‘역적[賊臣]’의 손에 의해 편찬됐으며, 애초 이항복(李恒福)이 총재관이 돼 제학 신흠(申欽) 등과 찬수하다가 계축옥사(광해군 5년, 1613) 때 이들이 쫓겨나고는 이이첨 등이 초고를 산삭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료를 없앴다고 주장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芝峯類說)》을 쓴 그분이다. 원래 이수광은 당생으로 치면 북인이었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 시기에 낙향해 있다가 반정 후에 조정에 들어온 경우다. 임숙영도 비슷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정구는 《선조실록》 편찬관으로 참여했다가 김제남 옥사 전후로 배제됐던 인물로, 전에 우리가 잠시 다룬 적이 있다.

이정구 등의 발론이 있은 지 이틀 뒤 좌의정 윤방(尹昉)은 구체적인 선조 지문(誌文)의 실례를 들어 《선조실록》을 수정해야 할 이유를 제기했다. 그는 이산해(李山海)가 《선조실록》 편찬의 총재관이 돼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게을러져 세자에게 국정을 전담시켰다고 기록했으며, 선조의 지문에는 자손조차 모두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수정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이어 《선조실록》이 ‘사실이 왜곡된 역사[誣史]’라는 공감대가 이뤄지면서 해를 넘겨 수정 논의가 계속됐다.

 《선조실록》 수정 과정
《선조실록》의 수정은 《광해군일기》의 편찬에 의해 우선순위에 밀리고 이어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적절한 착수 시점을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인조19년(1641) 2월에 올린 이식(李植)의 상소로 다시 수정 논의가 시작됐다. 이어 선조 병신년(1596년. 선조29년)까지는 이식의 손에서 개수(改修) 작업이 대체로 마무리됐다. 인조24년에는 소현세자(昭顯世子) 빈인 강빈(姜嬪)의 사사(賜死)가 있었고 이듬해 6월 실록 수정을 주도하던 대제학 이식이 세상을 떴다.

효종이 즉위한 뒤에도 《선조실록》 수정에 대한 논의는 계속됐다. 이때에도 인조대 실록을 먼저 편찬할 것인지 《선조실록》을 수정할 것인지를 놓고 고심하다가 이번에도 《인조실록》을 먼저 편찬하기로 함으로써 《선조실록》 수정은 뒤로 늦추어졌다. 결국 《선조실록》 수정은 《인조실록》이 완성된 효종 4년 이후에야 추진될 수 있었다.

   
 
실록 수정은 중국 칙사가 왔을 때 잠시 지연되고 수정청이 자리를 옮긴 일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방해 요인이 없었기 때문에 이때의 수정 작업은 무난하게 진행됐던 것으로 보인다. 장황(粧黃)을 마친 실록수정본은 모두 8책이었으며, 5곳의 사고에 두기 위해 모두 40책을 간행했다. 이 중 이식이 편찬한 30년분이 6권이고, 이번에 수찬한 11년분이 2권이었다. 이를 춘추관에 봉안하는 동시에 실록수정의궤청을 두어 《수정청의궤》를 작성하게 했다. 이어 관례대로 세초를 하고 세초연을 벌임으로써 오랜 기간의 수정 작업이 마무리됐다.

  기록의 보완
《선조실록》 수정은 기록의 보완과 사론의 수정이라는 두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수정을 위한 〈범례〉를 확정했다. 이는 이식의 《간여본(刊餘本)》(문집을 편찬하고 남은 필사본)에 보인다.

《선조실록》 원본과 수정본의 기사를 비교하다 보면 이러한 일반적인 보완 기사와는 달리 몇몇 사건을 중심으로 보완이 이루어졌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전체 분량으로 보면 수정본이 원본의 5분의 1에 불과하지만, 이는 수정본이 원래의 사초를 이용할 수 없었다는 한계와 ‘수정’이라는 특수한 목적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수정실록은 선조시대의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는 필요한 기사를 보완하는 방향으로 편찬한 것이다.
보완된 기록은 선조대 주요 사건인 동서(東西) 분당·기축옥사(己丑獄死)·임진왜란에 대한 기사들이다. 동서분당과 기축옥사는 당론과 관련이 있으므로 그렇다 치고, 임진왜란은 의병활동의 비중이 높아졌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에도 의병과 조정의 대립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가 도주했던 감사(監司) 김수(金 目+卒)를 처단하려고 한 일부터, 이후 군공을 세운 의병장에 대한 시상의 배제에 이르기까지 여러 군데서 그 갈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병들의 활동 자료를 보완한 것은 임진왜란 극복의 원동력을 수정 담당자들이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관점과 관련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기조는 이어져 해전에서의 승리로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꾼 이순신에 대한 기록도 수정본에서 보완에 관심을 기울인 기사다.

 사론(史論)의 수정
사론이란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를 말한다. 이런 사론의 특성으로 보아 당시 수정 편찬자들이 가장 주의를 기울였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리고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에서 가장 왜곡이 심하다고 알려졌던 부분도 이 사론이었다. 사론 중 해당 인물이 죽었을 때 기록하는 졸기(卒記) 등을 근거로 몇몇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유성룡(柳成龍 남인) : (원) 왜(倭)와 강화(講和)를 주장하고, 근친(覲親) 중에 술을 마셨다. →(수) 학행과 효우(孝友)가 있었고 부친의 간병을 극진히 했다.

② 이이첨(李爾瞻 대북. 편찬자 본인) : (원) 영특하고 기개가 있었으며 간쟁하는 기품이 있었다. →(수) 선조실록 편찬 때 자신의 일만 기록했다.

③ 한준겸(韓浚謙 북인 유교7신) : (원) 겉은 관대했지만 속은 음험했다. 사류(士類)를 공격했고 유성룡 다음으로 나라 망친 죄인이다. →(수) 당시에 위인(偉人)이라 칭송했고 주로 외직(外職) 생활을 했으며 실록의 서술은 모함이다.

④ 기자헌(奇自獻 북인. 편찬자 본인) : (원) 과묵했으며 바르고 아부하지 않았다. →(수) 음험하고 흉악했다. 헛된 명예를 만들어 후세를 속이려 한 것이다.
⑤ 이정구(李廷龜 서인) : (원) 사부(詞賦)에 재능이 없어 인망에 부족했다. →(수) 중국 사신 전담, 문사(文詞)로 당시에 명망이 있었는데, 거짓이 심하다.

내가 조사해 보았더니 《선조실록》의 사론을 《선조수정실록》에서 수정한 인물이 40명인데, 위에서 보듯 대북(大北) 또는 편찬에 참여했던 사람 몇몇을 빼곤 모두 폄하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이라면 서인이나 남인, 소북 중에서도 능력있고 존경받는 인물이 없을 리 없고, 또 누구나 장단점이 있는 것이 사람일진대, 원본에서 보여 주는 대북 정권 담당자들의 자찬과 배타성은 사실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결국 실록 수정의 명분이 그른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계속>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