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은 국왕이 살던 곳이다. 그런데 국왕은 자연인일 뿐 아니라 국왕 자체가 시스템이고 제도이다. 자연인인 국왕의 거주공간으로만 보면 보통 사람과 비슷하지 않았겠는가? 문제는 국왕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제도였기 때문에, 국왕이 사는 궁궐은 제도에 걸맞은 규모를 갖추기 마련이었다. 국왕이라는 제도를 운영하기 위한 각급 관청, 예를 들어 건강을 돌보는 내의원(內醫院), 음식을 담당하는 사옹원(司饔院)에서부터 나라의 기간 행정조직인 육조(六曹), 감찰과 언론을 담당했던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의 분소(分所)도 들어와 있었다. 국왕의 자문기구이자 경연(經筵)을 담당했던 홍문관이나 국정 기록을 담당했던 예문관(藝文館)은 아예 관사(館舍)가 궁궐 안에 있었다. 게다가 한 나라의 상징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진시황(秦始皇)의 아방궁(阿房宮), 한(漢)나라의 미앙궁(未央宮)은 크고 화려하기로 유명했지만, 그 크다는 것만으로 비난하기에는 어려운 기능이 있었던 데가 궁궐이었다.

      다섯 곳의 궁궐
조선시대 국가의 예식과 국왕의 정치활동이 이뤄지던 궁궐로는 다섯 곳을 꼽는다. 법궁(法宮)이었던 경복궁(景福宮)은 북궐(北闕)이라고도 불렸다. 북궐이란 단순히 북쪽에 있는 궁궐이란 말이 아니라, ‘남쪽을

   
 
바라보고 조회(朝會)를 받는[南面] 국왕이 계신 곳’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동궐로 불린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이 있었는데, 지금 동궐도(東闕圖)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남아 있어 고증에 도움을 주지만 전문가의 말로는 현재의 동궐도를 다 믿기는 어렵다고 한다.
한편 서궐(西闕)은 경희궁(慶熙宮)으로, 영조 때 경덕궁(慶德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마지막으로 지금은 덕수궁(德壽宮)이라고 부르는 경운궁(慶運宮)을 더해 궁궐은 모두 다섯 곳이 된다. 다만 경운궁은 원래 격이 달랐다. 성종 임금의 형이었던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살던 집과 그 주위의 민가 몇을 개조해 임시 거처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을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경운궁의 슬픔
이들 궁궐 중 경복궁은 고종 때까지 중건하지 못했다. 창덕궁만 선조 말부터 중건에 들어갔던 얘기는 지난 호에 다룬 바 있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완성한 뒤, 창경궁도 중건했다. 그러나 막상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이어하길 꺼렸던 얘기도 이미 한 바 있다. 광해군 3년(1611) 10월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이어했고, 정릉동 행궁에는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이어한 지 보름이 지난 11월에 인목대비를 모시고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갔다가 광해군 7년(1615) 4월 창덕궁으로 이어할 때까지 무려 거의 3년 반이라는 기간을 더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바로 이 무렵부터 인목대비에 대한 폐위(廢位) 논란이 시작됐다. 이른바 폐모론(廢母論)이었다. 그러니까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긴 것은 경운궁에 인목대비와 함께 있으면서 겪어야 할 불편한 관계를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인목대비의 폐위는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이기도 했다. 뚜렷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선왕(先王)의 계비(繼妃)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것은 곧 광해군 자신의 새어머니를 어머니의 자리에서 쫓아낸 것이어서 인정에 용납되기 어려웠다. 우리가 궁궐 얘기 뒤에 좀 더 상세히 살피겠지만 광해군 5년 계축옥사로 친정이 도륙이 나고 이듬해에 아들 영창대군이 참살당하는 아픔을 겪은 뒤 광해군 10년 드디어 인목대비는 폐위돼 서인(庶人)으로 강등됐고, 경운궁은 서궁(西宮)으로 불리게 됐다. 역사는 종종 얄궂은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는 당시 인목대비가 유폐돼 있던 서궁, 곧 경운궁에 와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하지만 인조는 창덕궁에 거처했기 때문에 이후 경운궁은 다시 빈 궁궐로 남게 됐다.

    쉬어야 할 때 시작하는 공사
창덕궁은 광해군 원년(1609) 5월 무렵 중국 사신을 맞아 잔치를 열 수 있을 정도로 궁궐의 모습이 갖췄다.

   
 
그런데 광해군 2년 1월, 창덕궁에 거처하지 않고 행궁(行宮)을 또 지으려는 광해군에게 올린 사간원의 논계(論啓)를 보면 이미 이때부터 광해군은 궁궐 건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전쟁으로 모두 불타 버려 행궁이 오래도록 누추한 여염에 있으므로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항상 민망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 쌀과 포목을 애써 모아 어려운 형편을 헤아리지 않고 큰 역사를 일으켰다. 다행히 옛터를 다시 개척해 법궁(法宮)이 이미 완성됐다. 그런데 광해군이 내린 비망기를 보니, 목재를 수송하고 돌을 다듬으며 기와를 굽는 일을 봄이 오면 시작하라는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다른 궁궐 공사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비망기였다.

사간원에서는 “난리를 겪은 뒤 살아남은 민생은 모두가 조금은 쉬어야 하는데 국가의 불행으로 산릉(山陵)의 역사를 겨우 마치자 조사(詔使)가 겹으로 도착했으므로 은혜를 베푸는 것은 없고 백 가지 노역만 모여들어 탄식과 원망이 하늘에 사무친다”고 아뢰었다. 게다가 광해군 원년에는 흉년이 들었다. 그러니 궁궐을 더 축조하라는 명을 거둬 백성의 힘을 덜어 줌으로써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라고 간언할 수밖에.

   지휘 본부, 영건도감(營建都監)

   
 

며칠 뒤, 이번에는 사헌부와 함께 영건청(營建廳)을 혁파하라고 청했다. 영건청은 이미 광해군 원년에 등장한다. 아무래도 재정을 맡은 호조, 공사를 맡은 공조의 관원들이 중심이 돼 구성됐을 것이다. 양사의 영건청 혁파 요청이 있자, 광해군은 “영건하는 일 중에 폐지해서는 안 될 곳이 있다. 두세 군데의 긴요한 곳은 이어(移御)하기 전에 짓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답변했다. 그 ‘두세 군데의 긴요한 곳’은 창경궁이었다.

‘광해군일기’를 보면 이 무렵(광해군 원년~2년)에 궁궐도감(宮闕都監)이란 관청과 영건청이란 관청이 다 나온다. 도감이나 청은 대체로 임시 관청이라는 점에서 같다. 도감은 국가적인 행사를 담당하는 임시 관청으로, 영의정 등이 도제조를 맡아 일을 처리한다. 국왕·왕세자의 혼례를 담당하는 가례도감(嘉禮都監),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영접도감(迎接都監) 등이 그것이다. 반면 청(廳)은 요즘과 마찬가지로 소속 기관의 성격을 띤다. 어떤 관청에 소속된 임시 관청이라는 뜻이다. 대표적으로는 춘추관에서 실록 편찬을 위해 임시로 설치하는 실록청(實錄廳)이 있었다. 대동법을 담당했던 선혜청(宣惠廳)은 원래 호조 소속의 관청이었는데, 나중에는 이름은 그대로 쓰면서도 독립된 관청으로 운영됐다.
광해군 때 궁궐 공사를 담당했던 기관은 대체로 광해군 4년까지는 영건청, 5년과 6년은 계축옥사를 벌이느라 좀 쉬기는 했지만 선수청(繕修廳), 광해군 7~9년에는 선수도감(繕修都監), 광해군 9년 이후에는 영건 도감으로 불리며 광해군대의 궁궐 공사를 총괄지휘했다. 

   목재, 돌, 철, 기와
광해군 원년 10월에 궁궐 영건청(宮闕營建廳)에서는 창경궁 수리를 위해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재목이 필요했다. 백성들이 억울하게 동원되는 일이 없도록 전라도 부안(扶安), 충청도 서산(瑞山) 등지로 낭청이 목수들을 데리고 내려가서 벌채하게 했다. 별도로 6~7동(同)의 포목을 경비로 해 민가의 소를 고용해 끌어내게 해 배로 운반하도록 함으로써 민폐를 줄이려고 애썼다. 강원도 뱃길로 이동할 때나 황해도 장연

   
 
(長淵)에서 벌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포목이 부족한 경우에는 해당 고을의 공물(貢物)을 견감해 주든가 호조에서 처리하게 했다.
군정(軍丁·인부)과 장인(匠人·기술자)들의 요포(料布·삯)도 마련해야 했다. 이때 소요되는 수량은 포목이 200여 동이고 쌀이 2천여 석이었는데, 이것은 하삼도(下三道·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서 거둬들인 포목을 대체해 썼다. 포목 1동은 포로 50필이다. 1석이 4필 정도니까, 포목 1동은 12석이었다. 그러므로 200여 동이면 2천500석 정도가 된다.

구운 기와, 토목자재 및 석재와 대장간에서 쓸 숯과 같은 물품들은 우선 도감에 남아 있는 포목과 소금을 가지고 각 고을에 나눠 보내어 무역해서 바치게 했다. 부족한 수량은 역시 호조에서 미리 조처하게 했다. 단청에 쓰일 재료 및 정철(正鐵)·새끼줄·생칡 등의 물품도 배정해 문서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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