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과 이지적 향기가 공존하는 그분은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고 평론을 하는 교수다. 어느 날, 날마다 자살을 생각한다는 말을 해 가슴이 떨렸던 적이 있었다. 물론 실행에 옮길 의지가 확고한 것은 아니겠지만 혼란스럽고 외로운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필요했나 보다. 상한 속을 위로해주고 말을 잘 들어줄 것 같다며 주변에서 상담을 해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입담이 없어 주로 듣는 편이고 소문낼 위인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어서라는 평을 보태면서 거세되지 않은 날것의 감정을 쏟아내곤 했다.
순전히 내 이미지 때문인 것 같다. 그냥 편해 보인다. 별 걱정 없이 사는 모양이다.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소’까지 농담처럼 던지는 말 속에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다. 누구를 크게 부러워 해 본 기억도, 열정을 쏟아 몸을 던져본 적도 없는 무미한 생활인지라 얼굴에 굴곡을 만들지 않아 생긴 오해들이다. 그러나 속을 뒤집어보면 크고 작은 흉터가 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거쳐야 할 세파가 나만 비껴가지 않았을 테니 가파른 숨을 쉬어야 할 때가 어디 한두 번이었을까. 결함이나 굴욕이 숭고가 될 수는 없다. 그래도 최소한 못남으로 안내하는 일만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장애물이 나타나면 정면 돌파보다는 돌아가거나 아니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어찌 보면 비급한 행동이기도 하다. 세월 지나면 진심을 알아주겠지, 대놓고 나서지 않아 유쾌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를 배출하지 못해 긴 시간 오해가 쌓이기도 한다. 그래서 명쾌하고 직선적인 성격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부러워 한 적이 여러 번이다.
며칠 전 업무적인 일로 만난 분이 있다. 과정을 찬찬히 설명하고 밑에서 단계를 밟아 올라오지 않고 윗선에서 이미 결정을 해 놓고는 통보하는 식의 일 처리를 했다며 격양된 목소리로 따졌다. 자존심 상한 그분의 입장에 충분히 공감이 갔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라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덧붙여 분명한 성격이 부럽다며 진심을 전했다. 차 한 잔이 길어져 식사까지 하면서 마음을 열게 되었고 나중에는 서로의 개인사까지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다행스러운 결과라 돌아오는 마음이 가벼웠다. 살면서 ‘사생결단에 목숨 걸지 말라’는 선인의 말이 떠올랐다. 
모임에서 마음 맞는 몇 분이 모여 독서클럽을 만들었다. 한 달에 한 권, 정해진 도서를 구입해 읽고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인생의 중반을 넘어서는 연륜들이라 오롯이 축적된 삶의 경험이 녹아나오는 시간이다. 사회에서 하는 일은 다르지만 열중하는 농사꾼처럼 살아온 경험이 오지다 보니 참으로 유익한 시간을 나누고 있다. 이 달에 선택한 책이 사람의 마음자리를 다독이고 그러면서 나를 이해하며 존중해 주는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대단한 통찰이나 훌륭한 위인이 되는 견본서가 아닌, 편안하게 마음을 부리는 내용이라 가슴에 와 닿는다. 펄떡거리는 심장은 젊은이에게 내주고 우여곡절 겪으며 여기까지 온 긴 세월의 퇴적을 평온하게 보아주고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오면서 마모되어 둥글어진 모습이 따뜻한 봄 햇살처럼 여러 곳을 어루만져 긴장하고 있는 꽃눈을 틔우고 서로의 마음에도 훈풍이 불도록 돋움이 되면 좋겠다. 
봄이 오는 초입을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바람이 세다. 봄꽃은 지혜롭다. 숫자가 아닌 지혜로 시간을 책정한다. 올해는 유난한 늦추위로 봄꽃의 개화가 늦다. 매화도 산수유도 벚꽃도 사람들이 축제 기간을 정해 팡파르를 울리건 말건 시절이 올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린다. 독특한 개성이 존재해 각각의 계절이 아름답다. 여러 해를 거치는 동안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새기며 우리는 사계절을 맞이하고 떠나보낸다. 결국은 큰 흐름으로 흘러갈 계절 앞에, 소소한 날씨의 투정이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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