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공사를 비롯한 전각 공사는 계속되었다. 계축옥사 등이 잇달아 일어나면서 궁궐 공사가 1차 관심 사안은 되지 못했지만, 옥사가 마무리되면서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광해군 5년에는 창덕궁의 군영(軍營)을 영건했다. 역마군영(驛馬軍營)을 남군영(南軍營)으로 옮기고 남군영은 내원(內苑) 앞 옛 터에 다시 지었다. 이번에는 궁궐 공사 때 광해군이 보인 풍수에 대한 관심과 공사 하나하나에 대한 꼼꼼함을 알아보자. 

  풍수(風水)와 소문
광해군 7년, 환경전(歡慶殿)·문정전(文政殿)·명정전(明政殿)과 경운궁(慶運宮)을 수리하라는 전교가 내려갔다. 동시에 인경(仁慶)·경덕(慶德) 양궁을 창립했는데, 경복궁(慶福宮)을 중건하고 경복궁으로부터 각도(閣道)를 만들어 인경궁(仁慶宮)에 연결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각도란 궁궐에 가면 볼 수 있듯이 각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복도를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성 안에 궁궐이 가득하고, 역적을 토벌하였다는 위훈(僞勳·잘못된 공훈)으로 재상이 된 사람이 조정에 가득하니 시사(時事)가 반드시 변할 것이다.”는 참언이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위훈이란 임해군 옥사부터 김제남 옥사까지, 옥사가 종결될 때마다 공신을 책봉하면서 내린 공훈을 가리킨다.
도성의 소문도 소문이지만 당시 광해군은 풍수에 관심이 쏠려 있었던 듯하다. 풍수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광해군 초반부터 나타난 경향으로 보인다. 모처럼 경연이 열렸던 광해군 3년 10월에도 이원익(李元翼)이 좌도(左道), 즉 풍수나 점술에 대한 광해군의 관심에 대해 경계를 나타낸 적이 있었다. 광해군 7년 김일룡(金馹龍)이라는 술사(術士)가 새 궁(창경궁)의 터에 대해 상소한 데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김일룡의 상소가 있자 광해군은 그 상소를 선수도감에 내렸다. 이를테면, 당시 창경궁(昌慶宮)의 동향으로 세워졌던 정전(正殿)의 옛터대로 하지 않고 남향으로 하는 새로운 제도로 고쳐 창건한다든지, 금내(禁內)로 도랑을 통하게 하기 위해 흙을 파내고서 구불구불 물길을 터 검을 현(玄)자 모양으로 만들려고 한다든지, 지맥을 가로질러 함춘원(含春苑)의 남쪽 기슭을 끊으려고 한다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김일경의 상소는 풍수에 입각해 궁궐 공사에 대한 대대적인 수정 요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선수도

   
 
감으로 상소를 내렸다는 것은 광해군이 그의 요구를 긍정적으로 판단했다는 의미였다. 창경궁의 정전, 즉 명정전을 원래의 동향이 아닌 남향으로 한다는 것은 설계 변경에 해당한다. 궁궐에 현(玄)자 모양의 도랑을 낸다는 것은 오행(五行)과 상관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언뜻 경주에 있는 포석정을 떠올리게도 한다. 잔치나 놀이를 위한 콘셉트는 아니었을까.
결국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형세를 버리고 인력을 빌려 조작해 자연히 이루어진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선수도감에서 반대함으로써 김일경의 상소는 기각되었지만 그렇다고 광해군의 풍수에 대한 선호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교하(交河) 천도
당시 파주 교하로 수도를 옮기자는 논의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궁궐 공사의 진행과 함께 교하로 수도를 옮기는 논의가 벌어졌다. 광해군 4년에 처음 수도를 옮기는 천도(遷都) 논의가 있었는데, 한양의 기운이 다 떨어졌으니 옮겨야 한다는 술관(術官) 이의신(李懿信)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수도를 옮긴다는 말이 나오면 민심은 술렁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당시 천도 논의는 좀 불순한 구석이 있었다. 바로 궁궐 공사를 합리화하기 위한 제스처의 성격이 짙었다. 광해군일기를 편찬할 때 사관은 아래와 같이 평론했다.

“왕이 이의신(李懿信)의 말을 받아들여서 장차 교하(交河)에 새 도읍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중론(衆論)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에 성지(性智)와 시문룡(施文龍) 등은 왕이 크게 토목공사를 일으킬 생각임을 알고 몰래 인왕산 아래가 궁궐을 지을 만하다고 아뢰었다. 왕이 무척 기뻐하면서 즉시 터를 잡으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이이첨이 비밀히 아뢰기를, ‘교하에 대한 의논을 정지하고 이곳에다 궁궐을 지으면 백성들이 반드시 앞다투어 달려올 것입니다.’”라고 했다.

꿩 대신 닭인지, 아니면 의도된 성동격서(聲東擊西)인지 모르지만 교하 천도로 시끄러워진 민심의 의표를 찌르듯 교하 천도 논의를 그만두고 대신 궁궐 신축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인왕산 기슭에 있는 궁궐이 바로 인경궁(仁慶宮)인데, 이이첨의 건의에 따라 실제로 공사에 들어갔다. 사관의 평론은 광해군이 인경궁 신축을 추진한 배경과 이이첨의 부추김을 보여 주는 기록이다. 천도 논의가 반대에 부딪히자 광해군은 대신 인경궁을 짓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던 셈이다.

   
 

 
    꼼꼼하고 섬세한 관심
그런데 궁궐을 짓는 과정을 추적하다 보면 특히 눈에 띄는 장면들이 있다. 광해군 7년 11월 창경궁을 짓는 과정에서 광해군은 “문정전(文政殿)은 법전(法殿)이니, 둥근 기둥을 만들어 세워야 마땅할 듯하다. 지금 사각의 기둥을 만들어 세웠는데 둥근 기둥으로 바꿀 수는 없겠는가?”라고 전교했다. 문정전은 창경궁의 전각이다. 법전이라고 했지만 창경궁의 법전, 즉 정전(正殿)은 명정전이었고 문정전은 경연 등을 열고 정무를 보는 편전(便殿)이었다.

광해군은 편전 문정전의 기둥을 사각으로 했던 것이 맘에 들지 않았던지 둥근 기둥으로 바꾸라고 한 뒤에, 2년 가까이 지난 광해군 9년 4월 광해군은 “이궁(離宮)의 침전을 둥근 기둥으로 조성하였는가, 각진 기둥으로 조성하였는가? 살펴서 아뢰라.”고 전교했다. 침전(寢殿)이라고 했으니 문정전은 아닌 듯하고, 아마 창경궁의 침전은 통명전이니 아마 그 건물인 듯하다. 아마 문정전과 함께 통명전도 둥근 기둥으로 만들라는 전교가 있었나 보다. 통명전은 정조 때 소실되어 현재로서는 광해군 때 조성된 모습을 확인할 수 없으므로 사각 기둥이었는지 둥근 기둥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광해군이 공사 진행 과정에서 그때그때 그림을 그려 보고를 받고 결재해 진행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왕산 아래에 짓고 있던 인경궁이 완성되기 전에 궁궐은 ‘신궐(新闕)’이라고 쓰라고 지시하고, 모든 계사 및 각처에 보내는 문서에는 ‘신궐’이라고 부르라고 세심하게 챙기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또한 동궁(東宮) 나인들이 거처할 곳을 서둘러 끝내라는 지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조금 심하다 싶은 경우도 있다. 광해군 9년 인경궁 공사가 시작될 때 석재가 부족했던 적이 있었다. 영건도감에서는 도성 30리 바깥에서 돌을 떠와야 된다고 보고했던 듯하다. 돌을 뜬다는 말은 가끔 산에서 보듯이 석재를 파내는 것을 의미한다. 광해군은 30리나 떨어진 곳에서 돌을 뜰 경우 시급한 역사를 완료할 수 없을 것이라며, 창덕궁과 창경궁을 영조할 때처럼 창의문(彰義門·자하문) 밖의 돌을 떠다가 쓰라고 지시했다. 당시 돌을 뜰 때는 방향을 보고 떴던 모양인데, 광해군은 창의문이 신궐로부터 건방(乾方·복서쪽)이 되니 무방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울러 전각을 조성할 큰 돌은 우이동(牛耳洞)에서 떠왔는데, 별도로 감역관(監役官)을 정하고 수레를 나누어 보내라고 세세하게 지시했다. 내가 과문하기는 해도 궁궐 공사를 하면서 이렇게 꼼꼼하게 챙기는 군주는 많지 않았을 듯하다.

    문제는 재정(財政)이다.

짓는 것도 좋고, 관심이 많은 것도 좋으며, 꼼꼼한 것도 좋다. 문제는 그 공사비를 다 어디서 충당하느냐였다. 각 도(道)에 나누어 배정해 거두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마음이 급했던지 광해군은 정월 보름 얼음이 풀리기도 전에 목재 수송을 걱정해야 했다. 광해군 9년 정월 “얼음이 풀릴 날이 멀지 않았으니 선수도감(繕修都監)의 재목(材木) 중 외방에서 아직까지 상납하지 않은 것을 다시금 독촉해 경강(京江)에 납입하게 하라. 그리고 미처 실어들이지 못한 재목은 속히 실어들이라.”
공사를 지휘하는 선수도감인들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 을묘년(1615, 광해군 7년)은 궁궐을 조성하기에 아주 길한 해였는데도 단지 명정전(明政殿)의 좌향(坐向)이 목성(木星)을 범했다는 이유만으로 부득이 대략 수리만 했고, 이듬해인 병진년 이후로 4~5년 동안은 조성하기에 길한 해가 아니라고 하는데 새로 잡은 터에 또 어찌 불길한 해에 역사를 일으킬 수 있겠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해를 이은 큰 역사에 물력(物力)이 모두 고갈되었고 이미 민결(民結)도 징수해 낼 수 없는데, 도감에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쌀과 포목으로는 몇 달의 지공도 지탱해 나가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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