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공사 비용은 백성들에게 결포(結布)를 받아 해결했다. 토지를 가지고 있는 소유주에게 세금 외에 별도로 포를 받는 것이다. 일종의 추가 세금이었다. 광해군은 경외의 조공목포(助工木布)를 되도록 속히 납부하도록 독촉해 제때 보충해 쓸 수 있도록 하라고 다그쳤다. 각 도에서 올려 보낸 이 재원을 ‘조공미’·‘조공목포’, 즉 ‘궁궐공사를 돕는 쌀, 포’라고 불렀다.

    소요 비용은 얼마인가
궁궐공사에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갔는지 산출하는 것은 녹록지 않을 것이다. 석재·목재·철 등은 어딘가에서 구입해 조달하기도 했겠지만 나무와 돌은 주로 국유림에서 채취하는 경우가 많았고, 철도 국용을 담당하는 철점(鐵店)에서 조달했을 것이다. 또한 지방·중앙에서 동원된 일꾼의 인건비에, 전문 기술자들의 공임까지 계산해야 온전한 공사 총액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조사가 당장은 불가능하더라도 공사비 규모를 추정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공사가 한창이던 광해군 9년 6월 상황에 대해 사관은 이렇게 말했다. “영건도감에서 3개월 동안에 쓴 것을 살펴보니, 들어간 쌀이 6천830여 석이고 포목이 610여 동이었으며, 당주홍 600근의 값은 포목 60동이었고 정철(正鐵)이 10만 근에 이르렀으며, 각종의 다른 물품도 이와 비슷했다. 이를 모두 쌀과 포목으로 충당해 한 전각을 영조하는 데 들어가는 것이 적어도 1천여 동을 밑돌지 않았다.”
이는 당주홍(唐朱紅), 즉 중국산 주홍 600근을 수입해 오려다가 가격이 60동이나 돼 사오기가 어렵게 되자 국내산 주홍으로 바꾸자는 논의가 일어났던 기사에 대해 사관이 한 말이다. 주홍이란 수은과 황으로 만든 붉은빛의 고급 안료로 대궐의 문에 칠한다. 지금도 궁궐에 가면 볼 수 있듯이 문에 칠한 붉은빛 도는 안료이다. 이 안료로 각 전(殿)이나 월랑(月廊)과 문, 벽 및 누각을 칠했다.

   “골수까지 뽑아내었다”
사관은 또 이른바 영건도감의 낭청이라고 하는 자들부터 아래로 장인(匠人)들에 이르기까지 그럭저럭 날짜나 보내면서 한갓 늠료(凜의 이수변 대신 엄호밑변 料)만 허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쌀과 포목은 한계가 있는데 공역은 끝날 기약이 없어 백성들의 골수까지 다 뽑아내었으므로 자식들을 내다 팔았으며, 떠도는 자가 줄을 이었고 굶어죽은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 심한 경우에는 왕왕 목매 죽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저 영건도감에 있는 자들은 너무도 어려워서 계속할 수 없다는 의견을 임금에게 고하지는 않고, 매번 백성들에게 긁어모아 크고 사치스럽게 궁궐 짓기에 몰두하고 있으니 통탄을 금치 못하겠다고 했다.

인경궁·경희궁을 지으면서 광해군이 백성들을 배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광해군은 “철거하는 민가의 주인들에게 각별히 알려 그들로 하여금 조용히 옮겨가도록 하고 소요를 일으켜 나의 부덕을 더하지 말게 하라. 그리고 재목과 기와의 값을 일일이 분명하게 계산해 속히 제급해 주라.”고 전교했다. 그러나 사관은 철거에 따른 현실을 “궁궐 하나를 지음에 민가를 철거해 도로에 떠돌아다니면서 울부짖으며 의지할 곳이 없는 자가 거의 수백 호나 되었다.”고 적고 있다.
게다가 4결당 1필을 거두던 결포를 1결당 1포씩 거두는 방안이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원래 4결당 1필을 거두는 것도 평상시 전세(田稅)의 25% 인상이었다. 25%가 아니라 100% 인상이 추진됐던 것이다. 결국 조삼모사(朝三暮四), 1결당 1포를 두 번에 걸쳐 거두자는 의견, 혹 2결당 1포나 3결당 1포를 거두는 것이 무방하다는 의견,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복정하는 것이 무방하다는 의견이 제출됐다. 광해군은 이 중 가장 세금이 무거운 방안, 즉 1결당 1필을 거둬 쓰라고 전교했다. 이제 또 서별궁(西別宮)을 영건하게 되자 광해군 9년 7월, 영의정이었던 기자헌조차 반대하는 차자를 올릴 정도였다.

    국방비를 초과하는 공사 비용
앞서 영건도감이 3개월 동안 사용했다는 궁궐공사 비용을 한 번 계산해 봤다. 앞서 3개월 동안 들어간 비용이 쌀은 6천830여 석, 포목이 610여 동, 정철 10만 근이라고 했다. 이를 셈해 보자.
①쌀 6천830여 석+포 600동[≒7천 석(1동=50필, 1필≒3-4두(1석≒4필), 50필≒12석)]≒1만3천여 석.
②정철 10만 근은?[정철 1근에 쌀 1두 7승, 쌀 1석≒8근]≒1만2천여 석.
①+②≒2만5천여 석. 이것이 석 달 동안의 비용이니까 따라서 한 달 비용≒8천여 석.
계산은 가능한 줄여 잡았다. 혹시 부풀렸다고 의심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8천여 석이 들어갔다면, 1년이면 적게 잡아도 9만 석이다. 정철의 경우 당시 무기를 담당하던 군기사(軍器寺)에서 1년 동안 거두는 공철(貢鐵)이 1만 근이었다.(『광해군일기』 권80, 6년 7월 25일(을해)) 즉, 나라의 1년치 무기 제조에 들어가는 철보다 10배나 되는 철을 석 달 동안 궁궐 짓는 데 허비했다. 우리가 곧 다루겠지만, 이 정도면 북쪽에서 흥기하는 후금(後金)에 대한 방비는 이미 포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것도 기억해두자.
한편, 이로부터 2년 뒤인 광해군 11년의 기록에 따르면 영건도감에서 1개월 비용을 4천 석으로 잡고 있다.(『광해군일기』 권101, 11년 4월 22일(을해)) 그러면 광해군 9년과 11년의 기록에 따라 대략 1달에 4천 석에서 8천 석, 1년에 4만여 석에서 9만 석 정도가 궁궐공사 비용이었다는 말이 된다.
당시 호조에서 거뒀던 전세(田稅)가 연간 8만~9만 석이었다. 그것도 광해군대가 아니라, 양전을 거쳐 형

   
 
편이 나아졌던 인조대의 통계이다. 나중에 대동법 개혁으로 전세로 되는 공납이 전세의 약 3배 정도 됐다. 이것이 조선정부의 전체 재정 규모였다. 공납 중에서 지방 재정에 투여되는 비용을 고려하지 않아도 그렇다. 그러니까 아무리 적게 잡아도 궁궐공사비는 전체 국가 예산의 15~25% 정도가 들어간 셈이다. 이 비용은 현재 대한민국 국가예산 중에서 교육비나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과 같다.

   거두고 또 거두고
비용만으로는 공사가 되지 않는다. 사람이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만만한 스님들을 동원했다. 이른바 승군(僧軍)이다. 1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님들로 공사가 되겠는가? 당연히 기술자가 있어야 했다. 광해군 10년경에 군장(軍匠)이 약 5천800명에다 +α의 인원이 궁궐공사에 참여했다. 이러니 서울은 물론, 지방의 기술자들도 차출해야 했다. 그에 따라 지방에서는 필요한 물품과 사업을 조달하거나 추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국가 재정의 15~25%를 쏟아 붓는 토목사업을 벌이자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재원을 조달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궁가(宮家·왕자나 공주 집안)나 권문세가의 방납이나 탈법이 만연한 상태에서 재원 조달은 오롯이 자영농을 중심으로 한 인민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조달했을까?
지난 회에 다뤘던 ‘조도사’가 열쇠이다. 궁궐 건축에 필요한 비용, 특권층의 방납과 그들에 대한 세금 면제로 생긴 재정의 결핍을 조달할 특별 관원이 조도사나 독운별장(督運別將·세금 운반 감독관)이었다. 궁궐공사는 광해군대 내내 계속됐으므로 조도사는 광해군 초반부터 파견됐고, 광해군 2년 2월에 이미 조도사의 존재가 사료에 나타난다. 그런데 세금만 거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만행으로 인한 피해도 컸다. 한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광해군 15년 2월에 올라온 전라 감사가 보고에 따르면, “독운별장 우찬순(禹纘舜)은 독운의 일을 핑계삼아 사족(士族)의 집에 마구 들어가 부녀자를 강간하고 심지어 상가(喪家)의 궤연(木없는 机 筵)을 봉안한 데를 버젓이 철거시키고 음행을 하는 장소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역졸을 함부로 형벌하고 역말을 함부로 타고 다닌다고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끝내 우찬순에게 벌을 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광해군의 조정은 비어갔다. 몇 차례 역모 사건을 겪으면서, 그리고 무리한 정책이 추진되고 정작 추진돼야 할 민생시책인 대동법과 양전(量田)은 미뤄지면서 지식인층과 일반 백성들의 마음도 떠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조도사나 독운별장을 맡을 관리를 뽑기도 어려웠다. 원래 이렇게 정상적인 행정이 아닌 특별한 상황에서 수행하는 공무일수록 담당자가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한량·무뢰배 등 아무나 끌어다 조도사와 독운별장을 맡기게 됐다. 그 결과의 하나가 위에 든 사료이다. 물론 빙산의 일각이었다. <계속>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