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한 궁궐공사 비용을 백성들에게 수탈하기 위해 각지에 조도사(調度使)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 일을 맡을 관원도 뽑기 힘들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관료집단의 풀(pool)이 되는 당색을 정치에서 배제했기 때문에 사람이 없었다. 결국 한량·무뢰배 등 아무나 끌어다 조도사와 독운(督運) 별장을 맡기게 됐다. 그들의 행패로 곳곳에서 민원(民怨)이 들끓었다. 역사를 보면 이런 경우 항상 수반되는 병폐가 있다. 관직을 파는 일, 매관(賣官)이다. 나라가 백성을 대상으로 관직 장사를 하는 것, 한 나라의 타락을 보여 주는 가장 명징한, 바로 그것이다.

  주춧돌을 빼어 바치고
궁궐공사를 위해 필요한 돌·나무·철·아교 등 각종 자재가 부족해지자 그 자재를 기부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광해군 9년(1617) 8월에 영건도감의 보고를 먼저 살펴보자. “무겸 선전관 구인후(具仁 后밑土)는 집터가 인경궁 남쪽 담장 밖에 있는데 계단돌과 주춧돌 모두 210개를, 전 부사 김첨(金瞻)은 집터가 남소문동(南小門洞)에 있는데 그 계단돌과 주춧돌을 모두 279개를, 전 첨사 이문창(李文菖)은 집터가 창의문(彰義門)과 인경궁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그 계단돌과 주춧돌 모두 170개를, 전 현감 황유중(黃裕中)은 집터가 자수궁(慈壽宮) 뒤에 있는데 그 계단돌과 주춧돌 모두 151개를, 군자감 봉사 신순(申楯)은 집터가 명례방동(明禮坊洞)에 있는데 그 계단돌과 주춧돌 모두 120개를, 유학 김유(金瑜)는 집터가 인경궁 남쪽 담장 밖에 있는데 그 계단돌과 주춧돌 모두 175개를, 전판관 민복룡(閔伏龍)은 집터가 경덕궁 근처에 있는데 그 계단돌과 주춧돌 158개를 도감에 자진 납부하여 국가의 비용에 협조하였습니다. 돌 공사가 크게 들어가는 이때에 많은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자진 납부한 그 정성이 매우 가상합니다. 그리고 행 부호군 정경신(鄭景信)은 별도로 정철(正鐵) 200근을 마련하여 자진 납부해 왔습니다. 각별히 포상하여 공사를 협조하는 길을 열어주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굳이 나의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한양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집 주춧돌을 빼다 바치는 정성을 발휘한 것이다. 구인후는 나중에 인조가 되는 능양군(綾陽君)의 외종형이었으니까 그렇다 치고(그렇다 친다는 말도 어폐가 있다. 구인후는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하고 4년 뒤 인조반정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현직 관리도 아닌 사람들이 계단돌과 주춧돌, 철을 기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공사 커미션?

   
 
이에 대해 광해군은 “모두에게 가자(加資·품계를 올려줌)하라. 신순은 6품직으로 옮기고, 김유에게는 관직을 제수하고, 정경신에게는 매 분기마다 녹봉을 주어서 장려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고 전교했다. 이러던 중 어느 날인 9월인데, 《광해군일기》에는 조금 석연찮은 기록이 남아 있다.
영건도감에서 목재를 베어 오는 일로 문제를 제기했다. 심눌(沈訥)이란 사람을 고을 수령으로 제수한 모양인데, 심눌을 수령으로 제수한 일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의견이 문제였다. 의견이라 함은 공사에 쓸 목재를 심눌이 수령으로 간 평안도 양덕(陽德)에서 베어 오도록 한 것이다. 영건도감에서는 부족분을 가까운 곳에서 베어 쓰는 것이 나을 텐데 하필 평안도에서 옮겨 오려 하느냐고 광해군에게 물었다. 평안도는 관방(關防·국경 변방)의 중대한 지역이므로 많은 사람들을 동원시키는 것이 온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난 창덕궁을 중건할 때에 양덕(陽德) 등지에서 목재를 베어 대동강(大同江)으로 내려보낸 뒤에 그 도의 감사가 바다로 운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장계를 올렸고, 이어 방매(放賣·지역에서 판매함)하도록 했으나 사겠다는 사람이 적어 결국 목재가 썩어 낭비만 초래했다는 것이다. 영건도감에서는 원칙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하면서 거기서 가져다 쓰더라도 경차관을 보내 평안도 감사와 함께 도내의 물력을 판단해 처리해야지, 일개 현감의 힘만으로는 해낼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계속 수령을 가려 보내야 한다고 고집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안에 대해 사관은 심눌이 궁중에 연줄을 대 관서지역에 좋은 재목이 많으니 베어다가 운반해 대궐을 짓는 데 쓸 수 있다는 것으로 왕을 꼬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명이 있었다고 기록으로 남긴 일이다. 우리가 지금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질문은 할 수 있다. 심눌이 궁중에 대었다는 연줄은 누구일까? 연줄을 댄다는 것은 아는 사람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재물로 로비를 한 것일까? 심눌은 왜 하필 관서지역에 좋은 목재가 많다고 건의했을까? 관서지역에 특별한 연고가 있던 것일까? 등등. 

   상례가 된 관직 매매
또한 영건도감에서는 공사를 장려하기 위해 여러 방책을 마련했다. 광해군 9년 10월, 영건도감 각 곳에서 풀무질을 해 여러 가지 못이나 장석을 두드려 만들어 내는 일은 매우 섬세하기 때문에 성실하고 정밀하게 만들도록 장려하고 태만하거나 서투르면 징계할 방법을 강구했다. 논의 결과 도감에서는 바닷가의 몇 개 고을을 정해 물고기와 소금을 특별히 청구해 잘 만든 장인(匠人)에게 주려고 했다. 이때 임피현령(臨陂縣令) 박안례(朴安禮)는 조기와 새우젓을 때맞춰 마련해 보낸 데다가 양도 많아 조기는 600두름, 새우젓은 40독이나 보내왔다. 당연히 박안례는 승서(陞敍)시켰다.

   
 

이 경우는 오히려 정상적이었다. 현직 수령에게 장려의 뜻으로 관품을 올려 준 것이므로. 또한 채색(彩色·염료)을 바친 한민정(韓敏政)에게 가자(加資)하고 임응길(林應 삼水변에吉)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시상한 일도 있는데, 이 역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원래 관품이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매관매직이 공공연하게 만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공명첩(空名帖)이 그 징표였다.

특히 쌀과 베처럼 조금 부유하면 확보하고 있는 물품과는 달리 재목은 모집하려고 해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었다. 그래서 영건도감에서는 이런 경우 공명첩을 넉넉하게 발급했다. 가끔은 납부자에게 제때 관직을 제수하지 않아 불만을 사기도 했다.

   고갈되는 물력
지방관들의 압박도 심해졌다. 물력을 조달하는 담당관이었던 지방 수령들은 자신들이 조정의 압력을 받는 당사자이기도 했지만, 물력 조달을 위해 백성들을 탄압하는 당사자이기도 했다. 청와(靑瓦)를 만드는 데에 사용되는 염초(焰硝)를 마련할 목면 24동(同)을 송화현감(松禾縣監) 임응순(林應順)이 그곳을 지키는 군관(軍官) 한중립(韓仲立)을 마구 때리고 빼앗아 갔다는 첩보도 올라왔다. 임응순이 과연 목면을 빼앗아 갔는지의 여부를 황해도 감사가 조사했고 그 결과는 미처 확인되지 않았지만, 공사 자재 조달을 둘러싸고 벌어진 지방의 각박한 현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악화돼 갔다. 대개 그렇듯이 악화라는 것은 악순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자라니까 더 긁어 가고, 더 긁어 가다 보면 생활이 피폐해지고 생산력이 떨어진다. 그러면 또 세금이든 부역이든 내기가 어려워지고, 그러면 또 독촉하고…….
광해군 14년의 영건도감 상황은 당시 궁궐공사의 진행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첫째는 청와(靑瓦)에 들어가는 염초(焰硝)를 김순(金純) 및 장원(張遠) 등이 관장해 구워 보내도록 사목(事目)을 가지

   
 
고 내려갔는데, 아직 조달이 되지 않았던 일이다. 그동안 작업장에 저축돼 있는 것이 다 떨어져 일을 중지해야 할 형편이 됐다. 할 수 없이 염초가 있는 곳을 수소문해 어렵게 한두 군데를 찾아냈으나 가격이 갑절이나 비싸 일부만 조달하고 말았다.
또한 공장들에게 먹일 양식도 조달이 힘들어졌다. 그해 12월, 영건도감이 쓴 것이 이미 3천여 석이 넘는데 하도(下道)에서 올려온 곡식은 고부(古阜)에서 납부한 150석뿐이었다. 호남 어사가 내려간 지 이미 오래됐는데도 상납할 기약이 없었다. 아예 업무 체계가 작동하지 않아 어느 고을에서 어느 날 실었고, 어느 고을에서 어느 날 포구를 출발했는지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사관은 다음과 같이 코멘트를 달았다. “각 도의 감사·병사·수사로 하여금 미포(米布)를 들이게 하면서 조공(助工)이라 칭하였다. 각도에서 이것을 앞다투어 많이 내려고 하여 서로들 백성들에게 긁어모으는 것을 일삼았는데, 왕은 그 납부하는 것의 많고 적은 것을 가지고 승진 발탁의 순서를 삼았다. 또 무뢰한 천류(賤類)를 조도(調度)라는 명칭으로 가탁하여 군읍에 나누어 보냈는데, 이들이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협하여 재산을 긁어모으면서 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온갖 가혹한 형벌을 다 내리므로 도로에서도 놀라고 두려워하여 귀신이나 도깨비를 보듯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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