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도(道)에서 올려보내는 공사 자재와 공명첩(空名帖)을 팔아 모은 공사대금 등 궁궐공사는 말 그대로 온 나라의 재정을 쥐어짜면서 이루어졌다. 이제는 광해군 후반대, 대략 광해군 9년부터 진행되는 일련의 사태를 염두에 두고 이 사안을 정리해 보자.
그 사안들을 미리 정리해 두면 다음과 같다.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를 대비의 자리에서 쫓아내자는 폐모론(廢母論), 광해군과 대북(大北) 정권의 실정(失政)에서 비롯된 윤선도(尹善道)·허균(許筠) 등 북인의 이탈 그리고 중국의 정세 변동에 대한 대응이 그것이다.

  독촉은 이어지고
1617년(광해군10) 2월, 광해군은 양궁(兩宮·인경궁과 경덕궁) 영건(營建) 공사가 날이 갈수록 세월만 보내고 있다며 더 감독해 속히 공사를 끝내라고 도감에 독촉했다. 아울러 재목과 쌀, 베를 모집해 쓰는 일에 대해서도 한층 관심을 두었다. 아예 당상 3품 실직(實職) 이하의 공명첩(空名帖·이름 쓰는 곳을 비우고 내리는 관직증명서) 및 면향첩(免鄕帖·반역 등으로 강등된 고을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문서)·면역첩(免役帖·군역 등을 면제해 주는 문서)·허통첩(許通帖·서얼에게 과거시험 응시자격을 주는 문서) 등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라고 전교했다. 부지런하고 민첩한 문관들을 넉넉히 파견하라는 것이었다. 늦어도 두 궁궐의 공사가 이듬해까지 마무리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건물을 짓는 데 필요한 바윗덩이를 캐내는 일까지 광해군은 일일이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백성들의 인심은 흉흉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흥미롭게도 광해군 자신의 전교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같은 해 4월, 광해군은 “듣건대 요사스러운 말들이 또 일어나 듣는 이들을 미혹시키고 있다 하는데, 주자동(鑄字洞) 근처에 또 궁궐을 지으려 한다고도 하고 혹은 경복궁(景福宮)과 인경궁(仁慶宮)을 이어지게 하는 공사를 벌인다고도 하여, 도성 백성들을 동요시키고 원근에서 듣고는 놀라게 하고 있다 한다. 이렇듯 인심이 불측한 때를 당하여 말을 만들어 내 군중을 현혹시키는 자는 효수(梟首)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방(榜)을 걸라.”고 엄포를 놓았다. 물론 광해군은 “새 궁전 건축은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것이며, 혹시 백성을 병들게 하지나 않을까 하고 늘 걱정하느라 한시도 마음이 편치를 않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북방의 불길한 조짐
이 무렵 의금부에서 문희현(文希賢)이라는 사람과 관련된 보고가 올라왔다. 문희현은 죄를 받고 정배(定配·유배)되었는데, 만주 사람(胡人)을 만났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감사(監司)와 병사(兵使)가 그를 군관(軍官), 별장(別將)으로 삼아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이 일로 전후 감사와 병사 가운데 생존해 있는 사람들은

   
 
조사를 받았다. 그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문희현은 함경도 경성(鏡城)에 유배된 사람이었다. 광해군 5년, 중국 상인들이 배를 타고 제주에 표류한 적이 있었는데, 문희현이 그 물건에 탐이 나 목사(牧使) 이기빈의 마음을 움직여 그 배들을 습격하고 재화를 나누어 가졌다. 이 일로 함경도에 유배를 온 것인데, 그가 여진어(女眞語)를 잘하자 병사가 회령(會寧)에 통상하러 온 호인(胡人)을 만나게 한 적이 있었다. 이 일로 만주 사람들은 문희현이 귀인(貴人)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누루하치가 문희현에게 글을 보내면서 선생(先生)이라고 칭했는데, 그 글에 “상국(上國·조선)이 자기 조부(祖父)를 죽이고 대대로 못살게 굴어 왔다는 것과 장차 군대를 일으키려 하니 조선이 불쌍히 여겨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일이 보고되자 조정에서 병사를 통해 “문희현 등은 전 병사의 군관으로서 지금은 이미 서울에 돌아갔다.”고 전하면서 편지를 돌려주도록 했다. 누루하치는 바로 후금(後金·나중의 청나라) 태조(太祖)이며, 우리가 아다시피 곧 누루하치는 실제로 중국에 반기(叛旗)를 들었다.

   남의 집 불 보듯
문희현의 사건이 발생하기 한 달 전인 광해군 10년 4월에도 이미 조짐이 있었다. 4월 17일 노적(奴賊·여진족)이 사하보(沙河堡) 등을 침범해 사람과 가축과 재물을 모조리 약탈해 갔으며, 요동(遼東) 총병(摠兵)이 전사했다는 것이다. 이에 밀운(密雲) 지역의 왕 군문(汪軍門)은 병마(兵馬)를 출동시켜 요동과 광령(廣寧) 사이에서 변에 대비하며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무원(撫院)은 의주(義州)에 공문을 보내 더욱 엄히 방비할 것과 병력을 합쳐 정벌할 일에 대해 전달했다. 이것이 명나라의 공식 파병 요청이었다. 의주 부윤 이선복(李善復)은 이런 사실을 치계(馳啓·급히 보고함)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조정은 위의 편지에 대해 그 이상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대였다. 북방의 상황에 대한 우려나 소문으로 전해지는 얘기에 동요하는 민심을 탓하기까지 했다.

광해군 10년 5월, 영건도감에서는 “남아 있는 미포(米布)가 거의 다해 가는데, 인경궁(仁慶宮)의 공사는 엄청나게 크고 대내(大內)의 요괴스러운 변고는 날로 심해지는 만큼 경덕궁(慶德宮)의 공사를 하루빨리 마무리지어야 할 것이니, 경덕궁에 모든 힘을 쏟고 포목을 거두는 일은 우선 중단하도록 해야 하겠다. 그리고 조공목(助工木)의 경우 외방에서 혹 갖추어 보낸다 하더라도 모두 민력(民力)에서 나올 것이니 차라리 민결(民結)에서 곧장 취하는 것이 낫겠고, 서울의 백관에게서 거두는 것은 적당히 헤아려 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고 궁궐 공사를 독촉하는 광해군에게 보고를 올렸다.

당연히 광해군의 호된 추궁이 뒤따랐다. “그런데 도감이 어떤 때는 두 궁궐의 공사를 모두 정지하라고 청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인경궁의 공사만 중단하자고 청하면서 감독할 뜻은 하나도 없이 오히려 공사 중단을 극력 쟁집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는다.”며 면박을 준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은 덧붙였다. “우리나라는 인심이 경박해 조금만 무슨 기별이 있으면 으레 먼저 동요되곤 하는데, 한번 징병에 관한 자문과 격문이 온 뒤로 소장과 차자가 어지러이 답지하면서 다투어 공사를 중단하라고 청하고 있으니 인심이 참혹하다고 할 만하다.”

   무기력한 기회주의의 전조
광해군은 노인에게 받는 가포(價布)와 교생(校生)의 강(講)을 면제한 뒤 받는 포목과 해조 및 사헌부의 속목(贖木), 장인(匠人)의 세포(稅布) 등을 어떻게 해서든 다방면으로 거두어들여 궁궐을 기한 내로 독촉해 짓게 하되, 가을과 겨울에 서쪽에서 오는 기별을 다시 보아가며 별도로 의논해 처리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서쪽에서 오는 기별이란 바로 북방의 상황을 말한다. 평안도를 거쳐 소식이 당도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10월이 되어서도 광해군은 궁궐에 지을 목재 조달에 몰두했다. 바다를 방어하는 배 역시 올해까지 재목을 운반하는 데 동원해도 지장이 없다는 인식이었다. 이런 상태로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파병을 했고, 준비 없는 파병의 결과는 참담했다. 먼저 광해군 11년 3월, 그러니까 강홍립(姜弘立)이 이끌고 출동한 조선 군대가 전멸하다시피 패배하고, 강홍립은 항복한 뒤에 기록한 사관의 말을 보자.
“이때 서사(西師·후금을 공격하러 갔던 강홍립 군대)가 패전하여 수만 명의 백성이 쓰러져 죽어 갔으니, 군사를 징발하고 군량을 운송하여 강변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당장의 급무였는데도 밤낮으로 일삼는 것이라고는 오직 궁궐을 짓는 한 가지 일밖에 없었다. 벌목을 하기 위해 오가는 관원이 도로에 이어졌고, 깊은 산 속의 나무가 다 베어졌으며, 포를 거두라는 명령이 성화와 같아 백성들의 힘이 고갈되었다. 구름에 닿을 정도로 웅장한 궁궐을 짓느라고 ‘영차, 영차’ 하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고, 공사(公私)의 비축이 다 떨어져 관작(官爵)까지 팔았다. 어떤 극단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고 마음과 힘을 다 기울였으니, 만약 궁궐을 짓고 보수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면 어찌 어지럽거나 망하는 재앙이 있었겠는가.”
이 논평도 인조 때 사관이 쓴 논평이니까 ‘광해군에 대한 매도’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판단은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자료를 기초로 내릴 수밖에 없다. 위 사관의 논평이 타당한지 아닌지. 일단 여기서 이 논평이 문제삼은 시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심하(深河) 전투에서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패배한 직후의 시기이다. 다음 회부터 다루겠지만, 명의 요청에 따른 파병을 광해군이 주저했던 것은 흔히 평가하는 ‘실리주의 중립외교’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궁궐 공사’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바로 대 후금 관계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시기적으로 앞서 발생한 사건 중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말한 대로 폐모론(廢母論), 북인 내부의 균열과 이탈을 먼저 다루고 파병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그것이 능동적 중립외교인지, 무원칙한 기회주의였는지, 그때 판단하기로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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