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논의는 종친이나 전현직 관리에게만 의견을 거둔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 있는 각 방(坊 요즘 행정구역으로는 구(區)에 해당)의 방민, 노인, 군인, 성균관과 사학(四學) 유생들까지 망라되었다. 실로 광범위한 여론조사라고 하겠다. 광범위할 뿐 아니라, 조선시대에 유례가 없는 여론몰이였다. 그리고 이 방식은 매우 특이한 연구주제가 될 것이다.

         인목대비의 폐위

광해군 10년 1월 진사 이건원(李乾元)도 상소해 이정귀(李廷龜)·

   
 
김상용(金尙容)·윤방(尹昉)은 임금을 등지고 역적을 편들며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는 데도 토죄(討罪)를 청하지 않았다고 대관(臺官, 감찰을 맡은 사헌부와 사간원)을 비판했다. 대관이 이 모양이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대관이 말하지 않은 죄를 다스리고 속히 인목왕후를 폐출하는 전형을 시행하라고 독촉했다. 그래서 1월 30일 폐출이 결정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존호(尊號)를 낮추고 전에 올린 본국의 존호를 삭제하며, 옥책(玉冊)과 옥보(玉寶)를 내오며, 대비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 서궁이라 부른다.” 존호를 낮춘다는 것은 곧 대비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국혼(國婚) 때의 납징(納徵)·납폐(納幣) 등 문서를 도로 내오며, 어보(御寶)를 내오고 휘지표신(徽旨標信)을 내온다.” 국혼, 즉 선조와의 혼인을 부정하는 조치이다. 왕비로서 가졌던 어보와 상징을 박탈하는 조치이다. 휘지표신은 대비의 권한으로 비상시 대처할 때 쓰는 부절이다.
“여연(輿輦)·의장(儀仗)을 내오며, 조알(朝謁)·문안(問安)·숙배(肅拜)를 폐지한다.” 타고 다니던 가마를 회수하고 신하들이 관직에 임명되었을 때나 정해진 기일에 하던 인사를 그만둔다는 뜻이다. “분사(分司)를 없앤다【승정원·병조·도총부(都摠府)·겸춘추(兼春秋)·사옹원·위장소(衛將所)·내의원·금루(禁漏)·주방(酒房)·승전색(承傳色)·사약(司?)·별감(別監)·내관(內官)·궁중의 각 차비 나인(差備內人).】.” 분사란 본 관청에서 파견 나간 관청을 말한다. 경운궁의 운영을 위해 두었던 각 관청을 철수시킨다는 의미이다. 괄호 안은 분사에 포함된 관원 및 관청을 의미한다.

     진상도 없애고

“공헌(貢獻)을 없앤다【각도(各道)의 매월 진상(進上)·각도의 삼명일(三名日) 진상·정부 및 육조(六曹)의 물선(物膳)·정부의 표리(表裏)·각사의 삼일 공상(三日供上).】.” 공헌은 공물을 바친다는 뜻이다. 공헌은 예물인데, 이미 대비의 지위를 삭제한 이상 예물을 올릴 이유가 없었다. 삼명일이란 정조(正朝)와 동지(冬至)와 임금의 탄일(誕日)을 가리킨다. 물선은 생활물품이나 식재료인데, 쌀과 콩, 고기[魚]·젓·기름[油]·과일·나물·생육(生肉)·지포(紙布) 등이다. 표리란 옷감이다. “서궁의 진배(進排)는 후궁(後宮)의 예에 따르며, 공주의 늠료(凜의 이수변 대신 엄호밑변 料)와 혼인은 옹주(翁主)의 예에 따른다.” 진배 역시 음식, 물품을 조달하는 일로, 음식의 종류, 절차를 포함한다.
그런데 대비를 갑자기 후궁 대우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후궁 대우는 왕비에서 강등될 수는 있어도 대비에서 강등될 자리가 아니다. 왕비와 대비 사이에는 선조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끼어 있다. 왕비에서 후궁으로의 강등은 선조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지만, 대비에서 후궁으로의 강등은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유폐하다

폐비 절목은 이어진다. “아비는 역적의 괴수이고 자신은 역모에 가담했고 아들은 역적의 무리들에 의해 추대된 이상 이미 종묘에서 끊어졌으니 죽은 뒤에는 온 나라 상하가 거애(擧哀)하지 않고 복(服)을 입지 않음은 물론 종묘에 들어갈 수도 없으며, 궁궐 담을 올려 쌓고 파수대를 설치한 다음 무사를 시켜 수직(守直)하게 한다.” 인목대비는 아버지와 아들이 죽은 것도 모자라 자신도 역적의 무리가 되었다. 죽어도 상복을 입고 슬퍼해줄 사람이 공식적으로는 없게 되었다. 그러니 종묘에 들어가 선조와 함께 제사를 받는 일은 아예 상상살 수도 없었다. 그리고 궁궐 담은 더 높아져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했고, 초소를 두어 무관으로 하여금 감시하게 했다.

이 제반 조치는 신임 정승 민몽룡(閔夢龍)이 맡았는데, 팔을 걷어붙이고 수염을 휘날리면서 흔연히 떠맡았다고 한다. 폄손 절목 일체에 대해 이이첨에게서 익히 지시를 받은 뒤 물음에 응해 물 흐르듯 거침없이 외워 나갔으며, 한효순은 머리를 구부린 채 ‘예. 예.’ 하고 대답만 할 따름이었다.
처음에 공주를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는 한 조목과 관련해 유간(柳澗)이 말하기를 ‘서궁을 일단 선왕의 후궁과 똑같이 대한다면 공주도 옹주로 낮추는 것이 온당하다.’고 했다. 공주는 아마 인목대비의 고명딸이자 영창대군의 누이인 정명공주일 것이다. 정명공주는 서궁에 인목대비와 함께 유배되어 있다가 계해반정으로 풀려나 공주로 복권되었다.

   이런 최후, 저런 최후

이때 유간이 옹주와 같은 대우를 해주려고 했으나 이이첨이 따르지 않고 단지 혼인과 늠료만 옹주의 예에 따르도록 했다. 광해군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해 옹주로 대우하려고 했던 유간을 울산부사(蔚山府使)로 내보낸 뒤 이어 다시 의논케 했다. 그리고 2월 11일 의정부에 모여 다시 절목을 늘려 정했는데, 이 내용은 유실되어 기록되지 않았다. 한편 이때 울산부사로 나갔던 대사헌 유간은 울산부사를 마치고 일본

   
 
가는 사신으로 차출되었다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고 한다.

한편 정승 한효순(韓孝純)에 대한 세간의 평도 있다. 그는 한준겸(韓浚謙)의 작은아버지이다. 젊었을 때부터 명망이 있었는데 늙어 죽을 나이에 이이첨(李爾瞻)에게 빌붙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갖은 아첨을 다해 정승이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이 사람은 반드시 큰 일을 저지를 것이다.’라고 했는데, 폐모론이 일어나자 효순은 날마다 정청(廷請)할 시기에 대해 이이첨에게 묻곤 했다. 그때마다 ‘김 좌윤은 무어라고 하던가요?’라고 물었다. 김 좌윤은 이이첨의 심복 김개(金 門안豈)이다. 그의 눈치를 보아 한 가지 일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한효순은 유간의 명령을 듣고 마치 ‘늙은 개처럼 절둑거리며’ 부랴부랴 달려가서 백관을 거느리고 정인홍(鄭仁弘)의 말을 그대로 조술(祖述)해 대비를 폐위시키자고 청했다. 한효순이 죽었을 때, 사관의 말로는 “사람들이 모두 돌로 쳐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때 와서 죽었다.”고 했다.

        출석 체크

그런데 《광해군일기》를 보면, 광해군이 〈서궁의 지위를 낮추고 지원을 줄이는 절목[西宮貶損節目]〉을 승인하지는 않은 것처럼 되어 있다. 절목을 계하해달라는 요청이 계속 올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절목은 사실상 시행되고 있었다. 이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광해군은 내내 ‘윤허하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했는데, ‘절목’의 모든 내용은 실행되고 있었다니. 아마 위에서 살펴본 절목을 시행하면서 부분적으로 수정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광해군의 생각에 흡족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폐모(廢母)가 확정된 뒤에는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탄핵이 이어졌다. 양사에서는 “전일 서궁을 폐출하는 일로 정청(庭請)한 것은 실로 온 나라 신민들이 충성심을 떨쳐 역적을 토벌하려는 의리에서 나온 것으로서, 대소 신료와 관학 유생과 방민(坊民), 이서(吏胥)들이 날마다 피끓는 정성을 바치며 계사(啓辭)를 진달했는데, 백관 가운데 수수방관한 자들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우선 보고 들은 자들만 거론해 논하건대, 오윤겸(吳允謙)·송영구(宋英耉)·이시언(李時彦)·이정귀(李廷龜)·유근(柳根)·김상용(金尙容)·윤방(尹昉)·정창연(鄭昌衍) 등은 시종일관 정청하는 대열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을 잊고 역적을 비호한 그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멀리 유배 보내라고 명하소서.”라고 시동을 걸었다.

이어 양사에서는 수의(收議)할 때 폐모에 반대한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이신의(李愼儀)·김권(金權)·권사공(權士恭)·김지수(金地粹)·조국빈(趙國賓) 등은 역적을 비호하려는 계책을 남몰래 품고는 감히 저쪽 편을 드는 의논을 바쳤습니다. 저쪽 편을 든 무리들을 다 다스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들은 그 정도가 특별히 더 심한 자들이니,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그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 멀리 유배보내라고 명하소서.”라고 했다. 이른바 사후에 이루어진 출석체크였던 셈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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