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목대비를 폐위시키라는 폐모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에 앞서 광해군 8년(1616) 12월 21일 한겨울의 추위를 일거에 날려 버리고 한양, 아니 조선 땅을 발칵 뒤집어 놓을 만한 상소가 당도했다. 그 상소의 주인공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당대 최고의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을 정면으로 겨눴다.

     윤선도의 청론(淸論)

   
 

“신하된 자가 나라의 권력을 혼자 쥐게 되면 자기의 복심(腹心)을 요직에 포진시키고 상과 벌[威福]을 자기를 통해 행사합니다. 어진 자가 이렇게 해도 안 될 일인데, 만약 어질지 못한 자가 이렇게 한다면 어찌 나라가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지금 훌륭하신 상께서 위에 계시어 임금과 신하가 각기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 있으니 이러한 자가 없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신이 삼가 예조 판서 이이첨(李爾瞻)의 하는 짓을 보니 불행히도 이에 가깝습니다.”
이 상소를 올린 이는 윤선도. 나이 30세의 선비였다.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라는 작품으로 배웠던 인물이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라는 후렴구가 기억에 남고, ‘동풍이 건듯 부니 물결이 고이 인다’로 시작하는 아름다운 가사(歌詞)로 기억된다.
윤선도는 윤유심(尹唯深)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8세 때 백부인 윤유기(尹唯幾·1554~1619)의 양자로 가서 해남 윤씨의 대종(大宗)을 이었다고 한다. 11세 무렵 절에 들어가 학문에 몰두했던 그는 이 상소를 올리기 이태 전인 광해군 6년 26세로 진사에 급제했다. 그가 상소에서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경우에도 이이첨의 파당이 아닌 자가 없으며, 그 때문에 성균관에서 올리는 상소는 겉으로는 곧고 격렬하지만 속은 실제로 아첨하며 빌붙는 내용이 아닌 것이 없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북인의 균열
윤선도의 상소는 상소를 접수하는 승정원으로부터 ‘선한 사람들을 일망타진하려고 올린 상소’, ‘무함하고 날조해 간사한 의논을 일으키는 계책’이라는 말을 들었고, 윤선도 자신은 ‘흉인(兇人)’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무슨 내용인데 이런 말이 나왔을까? 이 상소가 갖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선도의 상소 내용을 정리해 살펴보고, 이 상소가 나오게 된 이유와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윤선도는 상소에서, 근래의 ‘고굉(股肱)·이목(耳目)·후설(喉舌)’을 맡은 관원들과 ‘논사(論思)·풍헌(風憲)·전선(銓選)’을 담당하고 있는 관원들은 이이첨의 복심이 아닌 자가 없다고 지적했다. 대신이나 간관(諫官)·승정원·홍문관·사헌부 및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와 병조가 이이첨의 심복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앞서 살펴본 승정원의 비난이나, 곧이어 양사(兩司·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이이첨의 효우(孝友)와 청백(淸白), 충성과 절의’를 강조하며 변호했던 일, 홍문관에서 ‘이이첨의 충효와 대절은 신명이 알고 있다’고 강조하고 나선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바이다. 그러면서 오늘날 변방의 방비가 허술한 데가 많아 나라의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백성들이 원망을 품어 나라의 근본이 튼튼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당연히 인심이 투박해져서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지고 풍속이 아주 무너졌으며 염치가 없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윤선도 상소의 함의

   
 
윤선도가 지적한 국정의 문제점은 광해군 8년까지 노정된 국정의 난맥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조선시대 문치주의를 지탱하던 경연(經筵)과 사관(史官) 시스템과 정치를 풀어나갈 인적 네트워크는 시간이 갈수록 붕괴되었다. 선조 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분조(分朝)를 이끌고 능력을 인정받았던 광해군을 떠올리면 그가 즉위한 뒤 벌인 국정 운영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

즉위 후 정적(政敵)이었던 유영경을 귀양 보냈다가 자결하게 한 것은 그렇다고 쳐도, 아버지 빈소를 설치하자마자 친형인 임해군을 반역 혐의로 진도로 귀양 보냈다가 강화에서 살해했고 광해군 4년 김직재(金直哉)의 옥사, 광해군 5년 칠서(七庶)의 옥사에 이은 계축옥사, 광해군 6년 영창대군의 증살(蒸殺·방에 가두고 불을 때 죽임)로 이어졌다. 그리고 곧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폐모론(廢母論)이 등장했다. 특히 학문 전통을 중시하는 사림들 사이에서 정인홍(鄭仁弘)이 주장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문묘(文廟)에서 쫓아내자는 ‘회퇴변척(晦退辨斥)’은 사림의 종장(宗匠)에 대한 부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대북 정권은 서인이나 남인, 소북 등 타 정파와 극단적인 대립 상황을 연출했다. 이것이 윤선도가 상소에서 지적했던 이이첨 심복으로 조정이 채워졌다는 말의 의미였다.

     내부의 위기의식
재정위기, 민생 파탄에 이어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제도도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이 일상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당시에 자표(字標)로 서로 호응했다거나 시권(試券)에 표식을 했다거나 장옥(場屋)에 두사(頭辭)를 통했다거나 시험의 제목을 미리 누출했다는 등의 말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었다. 광해군 8년만 해도 별시·전시(別試殿試)의 급제자 가운데에는 고관(考官)의 형제와 아들과 조카 및 그들의 족속으로서 참방한 자가 10여 명이나 된다는 말도 퍼졌다.

이 뿐만 아니라 이원익이나 이덕형(李德馨) 같은 대신들도 조정을 떠났다. 윤선도도, “이원익(李元翼)은 우리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이며, 이덕형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에 몸바친 사람이며, 심희수(沈喜壽)는 비록 대단한 재능과 덕망은 없습니다만 우뚝하게 소신을 가지고 굽히지 않은 사람이니 또한 종묘사직에 공로가 있는 사람”이라며, 이들은 이이첨이 모두 삼사(三司)를 사주해 끊임없이 탄핵해 잇따라 귀양을 보내고 내쫓게 했다고 비판했다. 윤선도는 이 상소를 올리자마자 절도(絶島)에 안치하라는 명과 함께 부친 윤유기의 관작을 삭탈하고 시골로 내려가라는 처분을 받았다.

    같은 당색, 다른 판단
윤선도의 아버지 윤유기는 본래 이이첨과 같은 당이었는데 이이첨이 등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윤선도의 상소가 윤유기의 사주를 받았다는 비난이 나온 듯한데, 윤선도 자신도 말하고 있거니와 윤유기는 오히려 그런 혐의 때문에 상소를 올리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으면 늘 그렇듯이, 또 30세의 젊은 윤선도가 최고 권력자였던 이이첨에게 가한 시퍼런 비판이 충격 때문에 상소의 배후에 대한 논의도 불거졌다. 이이첨을 겨냥했지만 실은 삼사(三司)를 겨냥한 것이라느니, 홍무적(洪茂績)과 정택뢰(鄭澤雷) 등을 비호하는 것으로 보아 믿는 데가 있어 그렇다느니 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후대에도 이이첨과 경쟁관계에 있던 유희분과 박승종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추측은 무리가 있다. 윤선도가 “유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은 집안을 단속하지 못하고 몸가짐을 엄하게 하지 않으니 참으로 하찮고 용렬한 자들입니다. 이이첨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도 바른 말로 논계해 죽음을 무릅쓰고 쟁집하지 아니하니, 참으로 겁 많고 나약한 자들입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다만, 윤선도가 이들을 “나라의 훈척(勳戚) 중신(重臣)으로서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하고 안위(安危)를 함께할 자들”이라고 해 이이첨과 다르게 평가한 것은 사실이었다.

   
 

    귀양과 석방
비판과 옹호, 재비판, 반비판이 만만치 않게 이어졌다. 양사는 합계를 통해 “사과(司果) 윤유기(尹惟幾)는 본래 간사하고 사악한 인간으로서 성품이 뱀과 같고 행실이 개와 같습니다. 집안에서의 행실을 말하자면, 어미가 죽었을 때에 장례도 치르지 않았고 아비의 첩을 팔아먹었으며 재물을 다투다 형을 죽였습니다. 그의 몸가짐을 가지고 말하자면, 백성의 전답을 겁탈했고 벼슬살이가 탐욕스러웠으며 권세 있는 자에게 빌붙어 사돈을 맺었습니다.”라고 했고, 유학 이광계(李光啓)는 윤유기의 첩이 종실 이수의 친족이어서 상소를 올리라고 사주한 것이라고 상소하는 등 음모론과 인신공격이 격화되었다.
윤선도의 상소는 북인 내에서도 정국 운영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했음을 보여 준다. 윤선도가 지적한 문제점을 해결함으로써 광해군은 정국 전환의 계기를 맞을 수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광해군은 윤선도를 경원(慶源)으로 귀양 보냈다. 경원은 후금 땅과 인접했는데,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 이래로 죄를 얻어 귀양 가 있는 자들 가운데 나라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나라의 기밀(機密)을 가지고 오랑캐와 내통한다 해 모두 귀양지를 남쪽 변방으로 옮길 때, 윤선도도 경상도 기장(機張·경상북도 동래군)으로 옮겨졌다가 인조반정으로 석방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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