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부터 마음이 편해진다. 일거리를 싸와서 집에서 처리해야지 마음먹고 챙겨온 서류가방은 거실 구석에 던져두고 좀 쉬었다. 한숨 자고 개운한 정신으로 집중해야지. 잠깐 졸았나 싶다가 책도 읽고 신문도 뒤적이고 노래도 듣는다. 이럴 땐 커피가 제격이라 하겠지만 요구르트에 과일 몇 조각 넣어 갈아서 마신다. 건강에 좋을 것 같은 자기체면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뒹굴뒹굴,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게으른 고양이처럼 잠에 취해도 조급증으로 부대낌이 없어서 느긋한 시간이다.
한 보름을 불볕으로 달구던 무더위가 수그러지고 바람결 따라 비 냄새가 묻어온다. 비는 곧장 내려 열기를 식히고 촉촉한 생기가 솟아나게 해 준다. 배란다 창틀에 달아놓은 화분대에서 오밀조밀 모여 있는 다육이들이 까륵꺄륵 웃는 소리가 들린다. 내리는 비에 천진난만 물장난치는 꼬마들 같아 앙증맞다. 창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고 귀여운 녀석들 구경을 했다. 얼굴에 들이치는 비를 맞으며 내 머릿속 열기도 식혀본다.
집안 정리를 했다. 필요할 것 같아 쟁여둔 물건과 자료들이 구석구석에 쌓여있다. 신문에서 오려낸 종이는 누렇게 변해 활용 가치조차 없어 보이고 열심히 메모해 놓은 수첩과 노트도 그다지 쓸데가 없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철 바뀌면 필요할거야 보관했던 옷과 장신구와 가방에서 먼지 삭는 냄새가 난다.
들어내고 버리고, 가끔은 추억을 떠올리는 물건도 있어 지난 시간을 여행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노곤해진다. 피곤해진 몸을 누이고 달달한 숙면에 빠졌다. 다 잠든 시간, 새벽이 가까워지는 시간대에 깼다. 고요한 세상으로 나가본다. 멀리서 차 소리도 들리고 위층 어딘가에 엘리베이터 멈추는 소리도 들린다. 누군가는 시작하는 시간이고 누군가는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내게는 별 쓰임새 없어 홀대받는 물건들이 다른 이에게는 간절한 소망이었을지도 모르는 물건들을 내다 놓았다. 재활용이란 이름으로 쓰임을 받든 소각으로 흔적을 없애든 이미 내 소관이 아닌 그 물건들에게 자꾸 마음이 간다.

투덜댈 기운조차 없게 만들었던 여름이 드디어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을 준비한다. 맑은 하늘에 햇살이 쨍하다. 이부자리를 걷어 일광욕을 시키고 야채 통에서 시들은 고추와 가지를 채반에 널어 말리고 화초들을 보살피며 무더위에 입은 내상을 어루만졌다. 검게 변한 잎사귀를 떼어내고 진딧물을 잡아주고 죽은 가지를 잘라주고 영양제를 뿌려주었다.
새벽에 잠 깬 귀에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창창한 한낮 열기가 숨을 턱 막히게 하지만 계절은 제 섭리대로 성실하다. 무기력증을 유발할 만큼 혹독했던 더위가 물러나면서 메말라 푸석했던 가슴에 감성들이 돌아온다. 친절하고 싶다.

밀쳐놓았던 서류가방을 열어본다. 내가 해야 될 일들이다. 사람 사랑, 주는 것에도 받는 것에도 허허실실이 없어야 하건만 쉽지 않은 일들이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세상을 품어라 하는데 발에 채일 만큼 흔하디흔한 사랑은 입으로만 무성하고 진실 없이 덤핑으로 팔린다. 작아도 알찬 사랑을 나누고 싶다. 
덜어낸 집안은 넓어져 기가 잘 통할 것 같고 마음에도 공간이 생겼다. 훤해진 공간에 건강한 기운을 불러서 막히지 않고 잘 흐르게 장애물을 쌓지 말아야지 다짐해보다. 초등학생의 일기처럼 반성한 한 주다.
순수한 시절의 눈망울로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시원한 바람을 가슴에 담아 훅, 숨 막히는 열기를 날려야겠다. 입추도 지났으니 곧 절기가 바뀔 테고 계절의 길목에서 긴 시간 서성거리지 말고 날렵하게 곧장 걸어 들어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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