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공장들, 그 오랜 역사와 그 속에서 이뤄진 다양한 삶에 대한 이 연재가 어느덧 8부 능선을 넘고 있다. 앞으로 이 연재는 인천지역의 노동운동에 대한 성찰과 급속히 재편되고 있는 노동자층의 변화(남동인더스파크-옛 남동공단) 그리고 새롭게 조성된 거대한 도시문화(송도)에 대한 확인으로 마무리될 예정이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지금 잠시 숨을 고르며 도원동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물론 이 경기장은 공장이 아니다. 그러나 인천의 역사다. 이 경기장의 연원을 잠깐 훑어 봄으로써 인천의 ‘근대성’에 대해 한두 가지 생각을 갈무리한 후, 그 근대성의 가장 격렬한 형태였던 인천지역의 노동운동을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로 나눠 살필 예정이다.

국철 1호선 도원역에서 1분 거리에 있는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은 2008년 6월 13일 철거된 숭의종합경기장 부지에 새로 공사를 해 2011년 하반기에 완공하고 2012년부터 K리그 인천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으로 쓰고 있는 곳이다.

잠시 그 연원을 살펴보면 이 경기장의 옛 이름은 인천공설운동장. 인천의 20세기 스포츠문화를 이끌어 온 이 공설운동장은 원래 현 제물포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인천의 명문 제물포고교가 위치한 자리는 일제시대부터 웃터골운동장이라 해 이 항구도시의 근대성을 함축했던 곳. 시내 어디에서나 쉽게 올려다볼 수 있는 응봉산 분지를 웃터골이라고 불렀고 그 분지를 자연스럽게 활용한 운동장에서 근대 초기의 인천 스포츠문화가 태동했다. 1920년 11월 1일 일제가 조성했고 1926년 시설을 보강·확장하면서 인천공설운동장이 됐으며, 1934년 지금의 축구전용경기장 부지로 옮겨갔다. 그러니까 응봉산의 웃터골과 도원동의 전용경기장 일대는 개항 이후 근대 도시문화를 시작한 인천의 역사를 품고 있다.

근대적인 도시문화, 곧 ‘근대성’이란 기본적으로 도시·공장·노동자 등 세 요소를 바탕으로 한다. 서구의 경우 18세기를 시작으로 19세기에 이르면 이 세 요소가 응축돼 자본주의의 높은 발달을 이루게 된다. 19세기의 약소국이라면 스스로 이러한 근대성을 이뤄 가는 과정에서 제국에 의해 반강제로 기존의 삶이 재편되는 격동기를 거치게 된다. 그 격동은 상부 정치의 극심한 혼란(우리의 경우 갑신정변·을미사변·아관파천 등)과 민중 삶의 심각한 교착(우리의 경우 갑오농민혁명 등)으로 나타난다. 이 필연적인 혼란을 겪으면서 약소국은 제국의 강제 조정과 자기 나름의 갱신이 겹쳐진 근대성을 이루게 되는데, 축구전용경기장의 연원은 바로 그러한 자기 조정의 몸부림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지금 이 근사한 외관의 경기장은 20세기의 근대성 위에 형성된 21세기의 초국성을 말해준다.

1882년 제물포항에 입항한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호의 선원들에 의해 전파된 축구, 미국 상선과 YMCA에 의해 전파된 야구 그리고 일본인을 통해 들어온 그 밖의 수많은 운동 경기가 일제 하 인천의 문화적 근대성을 형성했다. 이 스포츠문화가 한반도 내륙지방의 도시가 아니라 인천이라는 항구도시에서 크게 발전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축구나 야구 같은 스포츠는 서구의 경우에도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는 전형적인 ‘근대적 시민문화’이다. 그러니까 일제 치하 인천지역의 야구문화를 상징했던 기차 통학생들 중심인 한용단 야구단이나 도원동 조일양조장을 중심으로 하는 축구단을 ‘애국계몽’의 관점이 아니라 봉건적인 구체제 사회에서 일찌감치 벗어나기 시작한 인천이라는 근대도시의 내면적인 변화로 해석하는 관점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천의 공장을 기록하고 있는 이 연재가 잠시 숨을 고르며 도원동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일제시대에 인천의 ‘젊은이’들이 독립을 향한 ‘애국심’으로 공도 차고 일본 팀에 맞서 승리도 했다는, 그런 기록과 해석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간과해서 안 될 사안은 그 무렵 형성된 인천이라는 항구도시, 그 당시 동아시아의 물류 교역 중심지였던 근대적인 도시문화 안에서 형성된 노동자들의 중추적인 일상문화이다. 일제시대의 모든 행위를 ‘애국독립’이라는 관점만이 아니라 새롭게 형성된 거대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민과 노동자의 근대적 자기 표현이라는 관점 또한 동시에 갖춰야 이 도시의 공장문화, 곧 노동자들의 일상과 분노와 저항을 내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근대적인 신문화를 접하는 한편 공장 안에서 열악한 노동환경이나 부당한 처우에 저항한 역사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인천의 근대성이 압축돼 있는 노동운동의 역사를 두 차례에 나뉘어 살펴보자. 1883년 개항 이후 인천항은 순식간에 동아시아에서 상당히 중요한 교역과 생산의 중심지로 변하기 시작했다. 외국의 수많은 수출입 화물이 항구를 통해 드나들었고 일본인을 중심으로 해 근대적인 상선, 항만, 생산 등이 인천을 숨가쁘게 변화시켰다.

우선 항만 노동자들이 하역 작업을 위해 모여들었었는데 1910년을 기점으로 해 인천을 비롯해 부산·원산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도시 임금 노동자들이 1만 명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일제에 의한 철도 부설, 광산 채굴, 산림 벌목 등은 식민지 조선의 곳곳에 거대한 노동자층의 형성을 낳았다. 김경일의 연구에 따르면 1911년 무렵 전국의 공장 수는 252개 정도였으나 1920년 2천87개, 1928년에는 5천342개, 1940년에는 7천142개 등으로 급증했고 노동자층 역시(조선인과 일본인을 포함한 직공·사무직 전체) 1911년에 1만4천600여 명에서 1930년에 이미 10만 명을 넘어섰고 1940년에는 30만 명에 이르게 된다.

   
 
특히 인천항은 개항 초기에는 자연지형을 이용하다가 청일전쟁 이후 급격히 늘어난 무역 및 물자 조달을 위해 1906년 이후 항만을 새로 조성하면서 이에 따른 건설노동자와 항만노동자가 급증했다. 노동을 제공한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시스템이 형성되면서 노무 제공과 관련된 일들이 파생했다. 교통·숙박·식당 등이 동인천 일대로 발전했고 여기에 미곡 수출입에 따른 정미소 공장이나 성냥공장·양조장·제염 등의 생산공장 형성으로 인천은 금세 전형적인 농어촌의 작은 포구에서 거대한 기계설비와 굴뚝과 운반시설을 갖춘 공장도시로 변하게 된다.

사정이 이렇게 급변하면서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의 자기 권리를 위한 요구나 쟁의도 촉발하게 되는데, 그 조직적인 움직임은 1920년대 이후의 일이 된다. 기본적으로는 임금 인상과 열악한 노동조건의 처우가 핵심적인 사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단체활동으로 이어졌다. 항만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은 방직·정미·토목·제분·제염 등에 걸쳐 다양한 파생되고 결합돼 마침내 1920년 6월 29일 조선노동공제회 인천지회가 창립됐다. 이어 1921년 9월에는 우각리에서 노동야학이 시작됐는데, 이곳은 1897년 3월 22일 경인선이 역사적인 기공을 했던 철도노동의 중심지였다.

아울러 1923년 4월에는 인천소성노동회가 결성됐다. 소성노동회는 1924년 조직을 인천노동동맹으로 확대 개편하고 조선노동연맹회에 가맹해 전국적인 노동운동에 동참한다. 1929년 초 4개월에 걸친 원산 노동자 총파업이 벌어졌을 때 인천의 이러한 노동단체는 적극적으로 연대를 펼치기도 했다. 지리적으로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는 인천과 원산의 노동운동이 지속적으로 연대활동을 펼쳤던 것은 개항장이라는 조건에 의해 서로의 열악한 환경에 대한 깊은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조직의 결성은 비단 눈에 두드러지는 쟁의나 파업만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도시 노동자의 시민문화 형성으로 이어졌다. 농어촌의 전통적인 대가족 관계가 아니라 각지에서 몰려든 다양한 계층이 등반·독서·야학·극장 구경·나들이 등으로 수평적인 도시 인간관계를 형성해 19세기의 인천이 아니라 20세기의 인천 도시문화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핵심이 됐다. 그들은 근대도시 인천에 형성된 문화 소비자층이자 동시에 크고 작은 공장이 밀집한 이 항구도시의 문화 풍경을 이끌어 가는 거대한 생산자 집단이었다.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수만 명의 인천 노동자들의 정서와 취향과 이념이 인천이라는 근대도시의 풍경을 변화시켜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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