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없는 전쟁
광해군 11년 4월 2일 명나라와 연합해 후금을 공격하러 갔던 강홍립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신이 배동관령(背東關嶺)에 도착해 먼저 후금의 역관[胡譯] 하서국(河瑞國)을 보내어 후금[虜]에게 비밀리에 알리기를, ‘비록 명나라에게 재촉을 당해 여기까지 오기는 했으나 항상 진지의 후면에 있어서 접전(接戰)하지 않을 계획이다.’고 했기 때문에 전투에 패한 후에도 서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만일 화친이 속히 이루어진다면 신들은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강홍립은 명이 압박해 참전했을 뿐이지 싸움은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고, 전투에 패한 뒤에도 잘 지내고 있다고 보고했다. 후금과 화친이 이루어진다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전달했다. 밀지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위의 광해군의 하유, 강홍립의 장계에 이어 광해군 11년 4월경 후금에서 온 국서(國書)에서도 이런 논조는 이어진다.
“너희 조선이 군대를 일으켜 명을 도와 우리를 친 것에 대해 우리는 너희가 이번에 온 것은 조선 군대가 원하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바로 명나라 사람들에게 압박을 받아 일본의 침략 때 너희를 구한 은덕을 갚기 위해 왔을 뿐이리라. …이 넓은 천하에 없어야 할 나라가 있겠는가. 어찌 큰 나라만 남고 작은 나라는 모두 멸망해야 하겠는가. 조선의 국왕 너는 우리 두 나라가 평소 원한이나 틈이 없었으니 지금 우리 두 나라가 함께 모의해 명에 대해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이미 명나라를 도왔으니 차마 명을 배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너의 대답을 듣고 싶다.”
위 국서의 앞부분은 강홍립의 장계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이 국서에서는 강홍립의 항복을 근거로 조선 국왕 광해군에게 명의 편을 들 것인지, 후금의 편을 들 것인지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강홍립의 말에 근거해 광해군의 태도를 최종 확인받으려는 후금의 국서라고 판단된다.

    허망한 기회주의
광해군은 줄곧 밖으로는 기미책(羈 摩의 手 대신 絲 策, 도발하지 않게 견제하는 외교)을, 안으로는 자강책(自强策)을 추구한 것처럼 말을 했지만 그의 대후금 정책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 심하전투에서의 실리주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강홍립의 말처럼 자신은 항복한 뒤 후금에서 잘 지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강홍립의 항복을 전후로 전사한 조선 군사는 참전 군사 1만3천 명 중 9천 명 정도였다.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 농업노동에 노예로 동원되었고, 강홍립은 인조 5년 정묘호란 때 후금 침략의 길잡이로 왔다. 항복이라는 실리주의의 결과치고는 너무나 처참하다.

둘째, 광해군은 자신의 입장이 후금과 화친하는 게 아니라고 극력 부인했다. 그러나 강홍립은 장계에서 ‘화친이 이루어진다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광해군 자신이 보낸 장군인 강홍립의 장계에서 나온 말이다. 국왕에게 올리는 장계에 이런 말을 쓰는 것이 과연 국왕과 사전 교감이나 논의가 없이 가능했으리라고 믿기는 매우 어렵다.
사실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광해군의 대후금 정책은 기조(基調)나 원칙(原則) 그리고 상황을 제어할 능력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숱한 옥사가 벌어지다 보니 조정에서 일할 인재가 없고, 대동법은 흐지부지되고 궁궐공사에 국력을 낭비하다 보니 자원과 군비가 허술해졌기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결과였다.

 무책임과 무대책의 양면
광해군 13년 6월의 일이다. 광해군은 “이 적(후금)들은 왜적과 같지 않다. 어찌 반드시 한 성을 함락시킨 뒤에야 밀려 들어오겠는가. 만약 수비를 하고 있는 의주 등의 성을 비껴두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온다면 어느 사람과 어느 병사로 막아낼 수 있겠는가. 생각만 해도 기가 막히고 간담이 서늘해진다. 중도에서 적을 막아낼 계책을 급히 마련하도록 비변사에 말하도록 하라.”라고 전교했다. 비변사에서는 “이 적들이 의주를 버려두고 곧바로 밀려온다면 중도에서 막을 계책을 마땅히 미리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황주(黃州)와 서흥(瑞興)은 바로 서쪽과 통하는 길이니 만큼 중한 군사를 배치하고 군량을 쌓아 두고, 밖으로는 방어를 하면서 안으로는 방어시설을 만드는 일을 찬획사와 찬리사 및 황연감사(黃延監司)에게 속히 유시를 내려 신칙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라고 회계했다. 이때 사관은 엄정하게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이른바 비변사의 회계라는 것이 계책 하나 세우는 것이 없고 다만 전교한 말을 부연해 허투의 문자를 지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혹은 ‘해조로 해금 정탈하도록 하라.’라든가, 혹은 ‘당사자로 해금 잘 처리하도록 하라.’든가, 혹은 ‘서둘러 유시를 내리라.’든가, 아니면 ‘신칙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는 말이니, 필경에 한 글자도 쓸 만한 것은 없고, 종이만을 허비하고 역로(驛路)만을 고생시킬 뿐이니 이를 보자면 웃음거리도 되지 않는다. 비변사가 어찌 붓이나 놀리며 말이나 장난삼는 곳이겠는가.”

 떠나는 사람들
광해군 12년 다른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이첨을 떠나는 사람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광해군 12년 2월 병조 참지에 임명되었던 김치(金緻)는 당초 이이첨과 한 몸이 되어 현위(顯位, 좋은 관직)를 두루 역임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이첨이 반드시 패망할 것을 알아차리고 병을 핑계로 직사를 맡지 않았다고 한다. 그 덕분에 반정 때 죄에서 면할 수 있었고 경상 감사로 있다가 죽을 수 있었다.

심지어 이이첨의 전횡을 대놓고 비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다. 광해군 13년 양사가 합계해 이이첨을 외딴 섬에 위리 안치시킬 것을 청했다. 또 사헌부는 집의 한영(韓詠)은 이이첨의 앞잡이로 머슴처럼 아부하고 첩처럼 비굴하게 아첨을 다했다며 관원 명단에서 삭제할 것을 청했다. 이때 광해군의 답변은 이러했다. “너희들은 이이첨의 앞잡이가 아닌가? 비굴하게 굽신거리고 갖은 아첨을 하는 것은 너희들도 역시 늘 하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에는 창을 거꾸로 잡고 죄를 주자고 청하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이 무렵 광해군 역시 이이첨을 매우 싫어해 자주 얼굴에 나타냈다고 한다. 아마 그런 기회를 타고 이이첨 탄핵 상소가 올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이첨을 놓지 못했다. 양사의 합계에 대해 “집안에서 화가 일어나 집안끼리 싸우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라고 이이첨에 대한 탄핵을 말리는 한편, 7월에는 이이첨의 심복인 윤인(尹 言+刃)을 대사헌으로 임명해 다시 언로를 이이첨에게 맡겼다.

  돌아서 버린 민심
상황이 어려워지자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사람을 불러도 오지 않자 그해 11월에는 “최관(崔瓘)·정엽(鄭曄)·이수광(李 日+卒 光)은 모두 품계가 높은 재상의 위치에서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 임금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 시국에 신하로서 신명을 바치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고 교외에서 빈둥거리면서 지내고 국가를 위해 힘쓰지 않으니 신하의 도리로서 이럴 수가 있는가. 또 대신과 대간이 이에 대해 한마디의 언급도 없으니 극히 놀랍다. 그들을 무겁게 추고하라.”고 다소 화가 나서 조사를 명했다. 정엽은 영창대군 증살 이후 정인홍과 관계를 끊고 은거 중이었고, 이수광 역시 상황이 혼탁해지는 것을 보고 교외의 별장에 은거하던 중이어서 시기를 받았다.
이듬해인 광해군 12년 8월에도 이이첨은 “유몽인(柳夢寅)은 문예(文藝)에 매우 뛰어난 사람으로서 지금 한산한 직책에 있으며, 홍서봉(洪瑞鳳)·김상헌(金尙憲)·장유(張維)·조위한(趙緯韓)·임숙영(任叔英)·김세렴(金世濂) 등도 역시 한 시대의 뛰어난 인재로서 모두 일에 연루되어 폐고(廢錮)되어 있습니다. 유근(柳根)·이호민(李好閔) 같은 이는 모두 시문을 짓는 데 노련한 사람으로서 죄를 입어 아직 단죄되지 않은 채 벌써 몇 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폐고된 자를 출사시켜서 죄를 씻어 주어야 할 때입니다.”라고 건의했다.
광해군 13년에 귀양가 있다가 방면된 한준겸(韓浚謙)을 도원수로 삼아 급박해지는 북방의 사안에 대처하게 했다. 또 이민구(李敏求)를 선위사(宣慰使)로 삼아 남도(南道) 지방에 떠도는 허황된 경보로 인해 혼란한 민심을 가라앉히도록 했다. 비변사에서도 정엽과 이수광 외에 임하(林下, 시골)에서 독서하고 있는 정경세(鄭經世), 세상의 이익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나가는 정광적(鄭光績), 공변되고 청렴하게 관직 생활을 했던 이성(李情), 세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우직한 태도를 고집하며 지내는 권태일(權泰一), 한마음으로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남이공(南以恭), 어려운 일을 꺼리지 않는 이귀(李貴), 재주와 국량이 뛰어난 홍서봉(洪瑞鳳)을 거두어 쓰자고 건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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