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고구려인들은 산동굴[山洞里]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했다. 산동굴은 비바람을 피하고 동물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어 동굴에 대한 감정은 대단히 일찍이 시작되어 산동굴의 정상을 향해 언제나 절을 했다. 기록된 ‘국동대혈(國東大穴)’이 1983년 5월 집안현 문물 조사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국동대혈은 집안 ‘태왕향상해방촌(集安太王鄕上村)’의 ‘흥동자구(汞洞子溝)’에 위치하고 있으며, 집안성(集安城)에서 16km의 거리에 있다.
흥동자구(汞洞子溝) 동남쪽에 압록강이 있고, 안쪽으로 동서 2개의 개울이 나누어져 있으며, 양쪽 주위에 산들이 있는데 봉우리가 매우 돌출되었다. 이 2개의 개울이 만나는 곳에 거칠고 높은 2개 산봉우리가 있으며 이곳에 거대한 동굴이 산 중턱에 있다.
고구려 국내성(國內城)에서는 17km 거리에 있으며 그곳은 또한 국내성의 동쪽에 치우쳐 있다. 이 동굴 입구는 높이 10m, 너비 25m, 깊이 20m이다. 동굴 입구의 전면은 평탄하다. 동굴면적은 600㎡이다. 이 동굴 내부에서 100여 명이 활동할 수 있다. 이 동굴 서쪽에서 위쪽으로 100m 지점에 작은 동굴이 있다. 이곳 동굴은 깊이 16m, 너비 20m, 높이 6m이다. 동굴바닥이 평탄하다. 동굴 지붕은 반원형으로 마치 다리형태이며, 이 동굴 내에도 100인이 활동할 수 있는 정도이다. 이 지역 사람들이 이 동굴을 ‘통천동(通天洞)’이라고 부른다. 고구려왕들이 ‘수신(隧神)’을 영접하는데 이 일은 바로 이 통천동(通天洞) 앞에서 실시했다.

이와 같은 ‘수적동굴[隧的洞穴]’에서 고구려에서는 수백 년 동안 관리들이 제사를 지냈다(백관제사, 百官祭祀).
국동대혈(國東大穴, 국가 동쪽 큰 동굴)은 즉, ‘국왕제단(國王祭壇)’이며,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한다. 제단은 큰 암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동굴 중앙에 놓여 있어 역대 왕들이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이 돌은 국왕의 전용물로서 보통 사람은 감히 그 앞에 가서 절을 할 수 없다.
고구려 사람들은 조상(祖上)을 숭배했다. 그것은 종묘(宗廟)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졸본(卒本)에 시조묘(始祖廟)가 세워진 외에 전국 각지에 조상 제사묘(祖祠)가 있다. 고구려인들의 조상에 대한 제사는 지속적 이었다. 국왕도 친히 가족을 데리고 제사를 지냈다.
실질적으로 고구려인들의 자연숭배, 귀신(鬼神)숭배, 조상숭배는 중국인들과 일치했다. 고구려사회발전단계에 중국 중원(中原)의 영향을 받아 ‘불(佛)’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불교(佛敎)는 세계 3대 종교의 하나로 보고 있다. 불교는 기원전 6~5세기 사이에 인도에서 탄생되었다. 불교의 기초이론은 ‘신은 사라지지 않는다[神不滅]’는 것이다. 즉, 인간의 육체가 사망하더라도 영혼이 영원히 존재하며, 생사(生死), 윤회(輪回)와 인과응보는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즉, 선한 행위는 선한 보답을 받으며, 악한 행위는 악한 보답을 받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현실의 고통을 받지만 착한(선한)업적을 쌓아야 내세(來世)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불교는 정신상 사람들을 노동도구로 생각시키고, 인간들의 안정을 마비시키는 정신적 아편으로 취급되어 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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