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그 정도로 정책이 올바른 방향을 찾거나 민심이 돌아설 상황이 아니었다. 광해군 13년에는 영남 유생 김시추(金是樞) 등 수백 명이 상소를 올려 이이첨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려 했다. 이이첨은 광해군이 이 소장을 보면 의혹을 가질까봐 양사를 사주해 논핵하며, 심지어는 김시추 등이 “활과 화살을 걸메고 진을 만들어 성에 들어왔다”고도 하고 “이는 역적을 꾀하고 난을 일으키려는 것이다”라고도 지목해 광해군을 놀라게 하려 했으나, 광해군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영남 유생들이 남궁(南宮)의 자물쇠를 부수고 수졸(守卒)들을 구타했다고 무함하는 등 유생들의 상소까지 가로막았다.

    모르지 않았거늘
광해군 14년, 광해군은 이정귀를 탄핵하는 신료들을 향해 “김제남(金悌男)이 그대들에게 덕이 된 지 오래되었다. 무릇 남을 모함하려는 계획을 가진 자는 반드시 제남을 함정으로 삼으니, 말이 신기하지 않고 듣는 것도 피로하다. 이 말은 이제 제발 그만들 하라. 이정귀는 1품의 중신(重臣)이다. 선왕께서 그에게 나라를 빛낼 재능이 있는 것을 가상하게 여기셔서 발탁해 문형(文衡)의 직임에 제수하셨는데 응태(應泰)의 무고를 통쾌히 변론했고, 내가 즉위함에 미쳐 또 문병(文柄)을 관장해 중국에 조회 가서 설명해 아뢸 때마다 황제의 은혜를 입었으니, 기록할 만한 훈공은 있어도 다스릴 만한 죄는 없다. 일이 있으면 기용하고 일이 완료되면 밟아버리니, 한 조정의 동료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인가”라고 모처럼 군왕으로서의 체모가 담긴 발언을 했다. 광해군 11년부터 문장과 외교에 능한 이정귀를 등용해 중국 사신을 맡기는 등 중용했는데, 이에 대해 비판이 일자 광해군이 했던 말이다.
사관은 “왕이 몰랐다면 그만이지만 대북의 정상에 대해 이와 같이 훤히 알았는데, 단지 폐모(廢母) 대론 때문에 흉도에게 조종당해 그들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었고, 끝내 분발해 힘써 배척하지 못함으로써 임금과 신하가 함께 망하는 데 이르게 되었으니, 가슴 아픈 일이다”라고 탄식했다.
전라도 남쪽 바닷가 장흥(長興)에 사는 전 도승(渡丞) 엄대인(嚴大仁)도 사관과 같은 심정이었나 보다. 그는 “오래 남쪽에 있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눈으로 보건대, 인심은 날로 흩어지고 원성은 구름처럼 일고 있어 위망의 조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궁역(宮役)을 빨리 정지해 백성들이 힘을 좀 펴게 하고 사사로이 바치는 것을 물리치고 공도(公道)를 따를 것이며, 산성을 다시 수리해 수어(守禦·방어)의 대책을 세우소서”했다. 물론 그렇게 되지 못했다.

   혼군(昏君)이라는 이유
대북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후금에 대해서도 광해군이 그렇게 무심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광해군 13년 2월, “적의 형세가 날로 치성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적들은 깊이 걱정할 것 없다고 여기는 것 같다. 나는 매번 이 적들의 형세가 왜적보다 백 배는 더 강해서 중국의 성곽과 보루들을 썩은 나무 꺾듯 무찌르면서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으로 쳐들어 가는 것은 반드시 어렵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다시 더욱 상세하게 의논해 잘 처리해서 이 적들로 해금 한강(漢江)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지 못하게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다. 이러한 뜻을 비변사에 이르라”라고 했는데, 이런 인식이면 충분히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고 다시 궁궐공사로 마음을 빼앗기는 그 심사가 어찌 안타깝지 않은가?
이것도 잠시, 광해군은 차츰 국정에 대한 책임감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해 5월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었다. 사간원에서 “오늘 대궐로 돌아올 때에 대가(大駕·임금의 수레)를 일영대(日影臺) 앞길에 머물렀다가 잡희(雜戱·광대놀이 같은 볼거리)하는 곳 앞으로 인도하도록 지시했는데, 붕거(棚車·수레)를 끌던 사람 한 명이 갑자기 수레바퀴에 깔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는 주관하는 사람이 잘 단속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니, 해당 관리를 먼저 파직시키고 차후에 추고하도록 하소서”라는 보고를 올렸다.

    “천천히 결정하겠다”
광해군의 대답은 “천천히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광해군은 ‘천천히 결정하겠다[徐當發落]’는 말이 입에 붙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우유부단한 데서 나왔으나 마침내는 간언(諫言·비판)을 거절하고 뇌물을 받아들이는 수단이 되었다. 이번에는 놀이를 즐기는 일 때문에 사람이 목숨까지 잃었는데도 해당 관리를 파직해 추고하라는 계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에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말하는 지경이 되었다. 세간에서 한 창녀가 길거리를 지나는데 젊은이가 웃으면서 만날 약속을 청했다. 여자가 대답을 하지 않고 지나가자 소년이 재삼 청을 하니 여자는 ‘서서히 결정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관은 “임금의 말이 오히려 창기들의 농담거리가 되고 있으니, 또한 매우 슬픈 일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광해군 14년이 되면 수령 중에 혹 탄핵을 받은 자가 있었는데 모두 유중불하(留中不下·결정을 내리지 않고 가지고 있음)해 1년이 경과하도록 관직을 비워 둔 경우도 있었고, 혹은 탄핵을 받고서도 그대로 관직에 있으면서 돌아가지 않은 자도 다수였다. 광해군이 날짜를 가리는 탓에, 중국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온 사신들을 10리 밖에 머물게 해 해를 넘기게도 했고, 사신의 일행을 대접하느라고 경기도 고을 백성들이 모두 시달리게 되었으므로 “만 리 길을 갔다가 돌아오기는 쉬워도, 도성이 보이는 곳에서 성에 들어가기는 어렵다”는 노래까지 생겨났다.

    반정(反正), 계속되는 삶
1623년(계해년) 3월 12일 밤 11시 경, 창덕궁 돈화문(敦化門)을 열자 반정군은 바로 궐내로 들어갔다. 호위군은 모두 흩어지고 광해군은 후원(後苑)을 통해 달아났다. 광해군은 상중(喪中)에 있던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으로 도망쳐 안국신이 쓰던 흰 의관을 쓰고 숨어 있었는데, 안국신이 고발함으로써 반정군들이 힘센 장사들을 보내 광해군을 메고 가서 약방(藥房)에 가두었다. 광해군은 강화 교동(喬洞)에 유배됐다가, 다시 제주로 귀양을 갔다. 거기서 20년 가까이 유배돼 있다가 1641년 7월 1일에 죽었는데, 그의 나이 67세였다.
광해군 시대. 배타적 인재 등용 또는 연이은 옥사로 인한 인재 손상과 방출, 민생 현안이자 재정 정책인 대동법 시행의 방해만으로도 나라를 정상적으로 운영하기는 힘에 버거웠던 시기였다. 게다가 궁궐공사와 함께 무계획적 파병까지 겹쳤다. 토목과 전쟁은 나라를 필망(必亡)의 지경으로 이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둘이 겹쳤던 것이다.
반정 직후, 궁궐공사를 즉시 중단했다. 그리고 궁궐을 짓기 위해 설치했던 영건도감을 비롯해 나례도감(儺禮都監) 등 12개의 난립했던 도감도 혁파했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던 조도성책(調度成冊·특별 세금 징수대장)을 소각하는 한편, 민간에 부과되었던 쌀과 포를 탕감해 주었다. 인조 즉위 후 삭감한 양이 원곡(元穀) 11만 석이었다. 당시 호조에서 거두던 1년 세금이었다. 삭감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정’은 말 그대로 인민들이 ‘정상적인 생활[正]로 돌아가는[反]’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선조 이후 해결해야 할 민생과 재정, 사회적 문제들이 멈추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남은 정도가 아니라 악화된 채로 방치되고 엉켜서 나뒹굴고 있었다. 잃어버린 15년의 시간이 남긴 무게는 단순히 지나가 버린 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실기(失機)의 업보까지 남겨 주게 마련이었다.

그렇게 계해반정 이후 사람들은 다시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반정은 그들이 선택한 행위이기도 했지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그러므로 선택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었든, 그들은 다시 농사를 지어야 했고, 바닥난 재정을 긁어모아 나라를 운영해야 했으며, 후세를 낳고 기르고 가르쳐야 했다. 무너진 사회의 기강을 세워 그래도 좀 더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했으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어야 했다. 그러다가 미처 여력이 없던 차에 닥친 침략에 허둥대기도 하고 답답해 죽고 싶기도 했다가, 다시 일어서 하루하루 이 땅에서의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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