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기호일보 독자위원

벚꽃 분분히 날리는 봄날, 문학회에서 여행을 떠났다. 장거리 이동이라 좀 지루해질 무렵에 버스 앞좌석에 앉은 선배님이 막간을 이용해 한 말씀하겠다며 들려준 이야기다.

칠십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 처음으로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했다 한다.

선배님껜 실례가 될 말이지만 샘 많고 참견 심하고 직설적이라 우리 회원 누구나 한두 번은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다.

선배님은 남매를 키우면서 매몰차고 무서운 엄마였다 한다.

애들이 4시간 이상을 자면 화를 참을 수가 없어 찬물을 얼굴에 들이부어 혼을 냈고 학교 성적도 1등이 당연해 성적이 떨어지면 분에 못 이겨 눈물 쏙 빠지게 야단을 쳤다 한다.

인천에서 서울대 보냈으면 최고로 교육 잘 시킨 엄마였고 덕분에 지들 지금 잘 살고 있으니 내 공을 허투루 돌리면 안 된다며 이건 생색이 아니고 사실이 그렇지 않냐고 농 섞인 말로 공치사를 하면서도 계면쩍어 했다.

듣고 있던 일행 중 누가 못 말리는 원조 극성 엄마 배려 차원으로 남매가 힘들었다며 신파조 변사 흉내를 내 다들 유쾌하게 웃었다.

선배님이 들려준 이야기다.

아들이 출장길에 찍은 벚꽃사진을 카톡으로 보냈는데 ‘시 쓰는 울 엄마 봄 받으시죠.’

뭉클하더라며 돌아보니 내 인생도 잠시 잠깐 피었다가 떨어지는 벚꽃처럼 그 세월 한순간인데 따뜻한 마음으로 왜 너를 안아주지 못했나.

세상천지에 흔해빠진 사랑한다는 말. 자갈밭의 돌멩이만큼 널리고 널려있어 발끝에 차이는 말인데, 가벼운 바람에도 벚꽃 잎처럼 우수수 사방에 날리는 말인데 귀한 내 아들에게 왜 한 번도 하지 못했을까. 늘 다그치고 화내는 무서운 엄마, 지독한 엄마만 했을까.

‘에미가 시인이라고 바쁜 와중에도 봄을 보내주었구나.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 아들아.’ 난생 처음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고 울었다 하신다.

살가운 모자 사이가 아니었으니 서로에게 꼭 필요한 의사전달만 했었고 가슴 속에 허한 공간이 있어 늘 추웠다.

시라도 쓰지 않았다면 무엇으로 견뎠을까. 니네들이야 자식에게 수시로 쓰는 말이겠지만 나는 사십 년이 걸렸다.

뭐가 그리 어려웠는지 따뜻하게 한 번 안아주지 못한 세월이 아쉽고 원통해 ‘사랑한다 아들아’로 제목을 붙여 가슴 절절한 시 한 편을 토해냈다며 지은 시를 낭송하셨다.

들뜬 여행길이 숙연해지고 목이 멘 선배님의 목소리에 듣고 있던 우리도 울먹였다.

우리 아들이 내가 보낸 답장을 보고 엄마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나?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죽는다는데 걱정스러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하더라며, 인생 선배로 꼭 해 주고 싶은 말인데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많이 표현하고 사랑하며 살아라로 마무리를 하셨다.

사랑한다, 사랑해. 유행가 가사만큼이나 흔해빠져 품위 없는 낙서처럼 휘갈겨져 있어도 증오하고 미워하는 마음보다는 아름답다.

세상이 힘들고 자주 슬퍼도 기운을 주고 쓸모 있는 존재로 내 자존감을 세워주는 힘을 가진 말이다.

말의 파장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실험을 본 적이 있다.

2개의 실험용 통에 똑같은 밥을 담아 하나는 수시로 ‘사랑해’란 말을 들려주고 다른 하나에는 ‘미워 싫어’ 같은 부정적인 말을 들려주었다.

1주일 후 놀라운 결과를 봤다.

유익한 곰팡이가 예쁘게 핀 밥과 썩은 곰팡이가 흉측하게 핀 밥을 보면서 사랑과 증오의 말 파장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섬뜩했다.

남에게 친절한 마음만큼 가족에게도 너그럽기가 쉽지 않다.

명품을 만들어 소유하고 싶은 마음에 과중한 의무와 높게 책정된 기대치를 적용하다 보니 여유를 가질 공간이 없다.

여백의 미는 높은 안목이 있어야 만들어지는데 닦달과 조바심으로는 엄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라는 걸 알고는 있다. 머리에서 생각한 것이 가슴에 스미어 행동이 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다.

선배님은 칠십 년 언저리까지 살아서야 ‘사랑한다 아들아’를 떨리는 목소리로 들려주셨다.

그 말이 억척 선배님 가슴을 적시고 흘러와 우리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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