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위대한 시인 중 하나로 손꼽히는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의 명시 중에 「화살과 노래」(The Arrow and the Song)라는 것이 있습니다. 시를 먼저 소개해 드립니다.

「화살과 노래 - 롱펠로」
나는 공중을 향해 화살 하나를 쏘았다네 / 화살은 땅에 떨어졌으나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다네 / 화살이 너무 빨리 날아갔기에 / 내 시선은 그것을 따라갈 수 없었다네
나는 공중을 향해 노래를 한 곡 불렀다네 / 노래는 땅에 떨어졌으나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다네 / 어느 누가 예리하고 강한 눈을 가져 / 날아가는 노래를 따라갈 수 있으랴
오래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한 참나무에서 / 그 화살을 찾았다네, 부러지지 않은 채로 / 그리고 그 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 어느 친구의 마음 속에서 다시 찾았다네 

방송 초년병 시절에 맡았던 한 심야 프로그램에서 청취자 전화연결 코너가 매일 있었는데 가장 멀리서 참여했던 청취자가 전라남도 곡성에 사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쏜 전파가 전남까지 날아갔던 것입니다.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당시의 방송출력으로는 수도권 전역과 멀어야 충청권 정도까지 전파가 갈 수 있다고 배웠던 저에게는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의 일입니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도 방송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방송의 장소적 제약은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방송사들마다 인터넷 듣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 지구 반대편에서도 대한민국의 방송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근무하는 경인방송에도 부산·제주·광주 등지에서 인터넷으로 잘 듣고 있다는 문자가 심심치 않게 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저는 그 때 전남 곡성에서 생방송 참여를 했던 분을 경험하고 나서, ‘방송은 불특정다수에게 전파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화살과 노래」라는 시도 방송전파에 비유해 다시 한 번 읽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놀랍기도 하고, 또 다른 눈으로 보면 두렵기까지 한 일입니다. 방송 전파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또 누가 듣는지도 알 수 없지만 누군가가 그 어디에서든 청취했을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이 시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무심코 공중을 향해 쏜 화살이 참나무에 부러지지도 않은 채로 오롯이 박혀 있는 것처럼 우리가 별 생각 없이 한 말이 누군가의 가슴에 오랜 세월 깊이 박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작 말한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리고 공중을 향해 불렀던 노래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친구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있듯이 우리가 한 말이 다른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노래로 기억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 시간을 통해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이 말이 듣는 사람에게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꽂힐까, 아니면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 기억될까를 생각한다면 말로 인한 실수는 자연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이상하게도 자신과 가까운 사람과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삽니다. 이 아이러니를 일컬어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합니다. 겨울에 고슴도치들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가까이 가면 서로의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게 되고, 떨어져서 지내게 되면 추워서 견디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쓴 우화에 나오는 말입니다. ‘호저딜레마’라고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로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어떤 말을 어떻게 하느냐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직장 동료들에게 여러분은 화살을 쏘시겠습니까, 아니면 노래를 부르시겠습니까?

오늘의 과제입니다. 단 하루만이라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듯 부드러운 언어를 사용해 보고 상대방의 반응을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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