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130년 맞은 인천항의 ‘130’이라는 숫자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어떤 숫자나 시점,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든 그것을 계기로 인천항과 인천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보고 미래를 가늠해 본다는 점 자체일 것이다.

인천의 개항은 사실 130년 전이 아니라 저 옛날 비류가 미추홀에 터를 잡고 백제가 산둥반도를 경영하던 때부터 이뤄진 것이다. 그렇게 역사를 꿰뚫어 문물과 문화를 주고받으면서 한반도의 교류와 문화 발전의 중심에 인천과 인천항이 존재해 왔고, 역할해 왔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130주년이 된 개항은 외세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그 숫자 자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개항으로 인천과 우리나라가 더 크고 다양한 문물과 인재를 끌어들이게 되면서 무한한 성장과 발전의 잠재력, 가능성을 품게 됐다는 점 또한 분명한 사실로 과거로부터의 발전상과 현재를 진단해 본다. <편집자 주>

#개항 당시 인천항의 모습
개항 초기 인천항은 대규모 대외 교역을 감당할 여건이 완비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를 뒷받침할 시설과 관세제도의 확충이 시급했고, 그에 따라 여러 차례에 걸쳐 항만시설 확장 등을 담당하는 해관과 관세사무 행정을 담당할 감리서를 설치해 운영하면서 조금씩 조선의 관문항이자 대외통상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다.

   
 

제도와 시설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개항기 인천항은 도읍의 관문으로 구한말 정치·외교·군사·통상을 위한 한반도 중앙의 항구였다. 그 입지 때문에 열강의 각축이 가장 심했던 곳이고 다양한 국적과 문화를 가진 세계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서울보다도 오히려 인천이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국제도시로서의 입지와 면모를 갖춘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은 또한 인천항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일이다.
 
#인천항 발전사와 주요 역할, 기능
개항 초기 인천항은 자연항으로 큰 선박이 월미도 남쪽에 정박을 하면 작은 배가 여객이나 화물을 부둣가로 옮기는 항이었지만, 근대화 과정에 있던 1923년 조수간만 차와 상관없이 입출항이 가능한 이중 갑문식 선거를 갖추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2천t급 기선 5척을 동시에 계류시킬 수 있었던 이 선거는 길이 454m, 폭 318m, 선거 내 수심 8~10m 규모였다고 한다. 이후 인천항은 교역량과 항세가 급격하게 확장되고 철도 같은 내륙운송도 발달하게 된다.

인천항사를 보면 그 시절 1920년대엔 인천이 근대적 문물의 전시장이자 호화 관광, 휴양지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우리 조선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처지를 더 비감스럽게 하는 장소이기도 했고, 일제강점기 후반엔 일제의 군수물자 보급로로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은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고 쓰여 있다.

해방 직후 인천항은 대한민국의 대외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인 제1무역항으로 수도의 관문항, 각종 산업물자 조달항으로서 기능을 수행했다.

하지만 6·25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파괴돼 항만 기능을 거의 상실하고 대한민국 무역에서 인천항이 차지했던 90%가 넘는 점유율도 1950년 이후 몇 년간은 수출입의 80% 이상이 부산항을 통해 이뤄지게 된다.

종전 이후 인천항은 대한민국의 재건과 산업화에 있어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 항만이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다시 일으키고 수도권과 중부권역에 위치한 공업지대에서 필요로 했던 산업 원·부자재가 인천항을 통해 수입이 됐고, 만들어진 제품은 인천항에서 부산항을 거쳐 해외로 수출됐다.

그러다 대한민국이 다시 일어서고 교역량이 점점 커지면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인천항 갑문을 다시 만들었고, 1974년엔 갑문 안 내항(內港)에 대한민국의 첫 번째 컨테이너 전용 터미널도 개장한다.

작은 여객선과 어선들을 위해서는 연안부두가 건설됐다. 지금은 많이 달라지고 더 커졌지만 대다수 국민이 알고 있거나 상상하는 인천항의 모습은 아마도 이 시기에 건설된 갑문시설과 연안부두 정도에 국한돼 있을 것이다.

1980년대 말 이후 냉전이 풀리고 소련·중국과 수교·교류가 시작되면서 인천항은 북방교역 시대라는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맞게 된다.

   
 
세계의 공장이자 시장이 된 중국과의 교역으로 인천항의 물동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기존 시설로 교역량을 감당하는 데 한계가 있어 남항과 북항 등 외항(外港)이 개발됐으며, 지금은 송도국제도시 옆쪽으로 새 국제여객부두와 터미널, 신항만, 그리고 배후부지를 개발 중에 있다.

인천과 대한민국 경제가 인천신항과 새 국제여객터미널, 배후부지 등 다시 인천항을 모티브로 새로운 성장을 모색하고 기대할 수 있는 시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인천항이 또 한 번 인천이란 도시의 발전의 중심이자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당당한 엔진 역할을 할 시기가 오고 있는 것이다.

항만이 국가 인프라 시설이고 인천항은 특히나 북한과 인접한 항만이라 시민들과 국민 일반이 접하기가 쉽지 않지만,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갑문항만과 연안부두 정도가 아닌 항세가 더 큰 항만이고, 2~3년 뒤면 한 번 더 큰 도약을 하게 될 대한민국 대표 항만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같이 인천항은 인천과 대한민국의 변화의 축이었다. 인천항의 성장이 인천이라는 도시의 성장이었고, 항만경제의 활력이 인천경제의 활력이었다.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문물이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또 대한민국 재건과 산업화 과정에서도 정말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 인프라 확충과 서비스 개선을 통해 앞으로는 더 큰일을 해 나갈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역대 최대 크루즈 동반 유치 성공 등 크루즈 입항
올해는 역대 최대·최다 크루즈선이 인천항을 찾는 해로 기록될 것이다. 3월에는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세계 최대 크루즈컨벤션에서 지금까지 인천항에 들어온 선박 중 가장 큰 규모인 14만t급 크루즈 2척의 기항을 확정지었으며 지난 11일 첫 배가 들어왔다.

이 2척 외에도 올해 인천항에서는 정기 크루즈 노선 서비스가 시작된다. 이 서비스는 우선 중국 톈진(天津)과 인천항 간 서비스로 시작해 다롄(大連)·제주·여수 등으로 기항지를 확대해 갈 예정이다.

 이들 외에도 지금까지 확정된 일정으로만 올해 8개 선사의 크루즈선박 10척이 100회 이상 인천항을 찾게 된다. 지난해 크루즈선 입항이 8회에 그쳤음을 감안할 때 폭발적인 성장이라 하겠다.

#크루즈 유치의 경제적 효과
한국관광공사가 인천항 크루즈 기항 시 발생된 부가가치를 조사해 분석한 결과가 있다. 인천항 입항 크루즈선박 1척은 순수 입출항 비용을 제외하고도 1천880만 원의 항만 이용 관련 비용을 지출하고, 승객들은 1명당 평균 46만2천 원을 지출하는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

기타 선용품과 부대서비스 등 직간접적인 전후방 연계산업을 통한 부가가치 창출효과도 크다. 올해 입항이 예정돼 있는 100여 회 크루즈 운항을 통해 약 15만 명의 관광객이 인천항을 통해 대한민국을 관광하면서 690억 원의 경제적 효과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인천항의 성장·발전
인천항은 환황해권의 물류중심, 동북아시아를 대표하는 해양관광문화의 거점이 될 것이다.

현재 인천신항과 신국제여객부두, 터미널 건설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신항에는 증가하고 있는 대중 물동량은 물론 전세계 어디로든 직접 화물을 보낼 수 있는 원양항로가 개설된다.

인천항을 통해 수출이 가능한 지역이 중국과 동남아를 넘어 유럽과 미주대륙까지 확장되는 셈이다.

 

   
 
수도권 기업들은 가까운 인천항을 이용함으로써 물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테고,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새 국제여객부두와 터미널은 세계의 부호, 비즈니스맨들에게는 서울과 수도권을 찾아 대한민국의 상품과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대한민국에는 우리의 문화와 정서를 세계에 알리면서 경제적 과실도 누리는 효과를 안겨 줄 것이다.

#인천신항의 문제점과 기대효과
인천신항이 성공적으로 개장하고 조기에 운영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적정 수심 확보를 위한 준설사업이 반드시 제때 이뤄져야 하며 이를 위한 국고 지원이 절실하다.

새 국제여객부두 배후물류부지 조성 비용에 대한 정부의 재정 지원 확대도 필요하다.

이 사안은 그 부지에서 비즈니스를 하고자 하는 투자자와 기업들의 비용 부담과 직결되는 문제다. 정부가 타 항만 수준(광양항 100%, 부산항·평택항 50%)으로는 형평성을 맞춰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경제자유구역 지정지이기도 한 항만배후부지 개발 방향과 관련해서도 토지이용계획, 도시계획 수립 과정에서 해양수산부, 산업통상자원부와 인천시 등 정부와 지자체가 가장 성공적인 부지 개발과 운영이 이뤄질 수 있도록 많이 관심과 협력이 필요하다.

 결국 모두가 국가를 위한 부가가치이고 인천의 기업과 일자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천신항은 인천항 최초로 대형 선박(1만TEU급) 접안이 가능한 부두로 건설되고 있으며 항로 증심 준설(14m→16m)로 대형 선박이 자유롭게 입출항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면 미주·유럽 등 원양항로 개설을 통해 환황해권 국제물류 거점항만이 될 것이다. (※TEU=Twenty-foot Equivalent Unit의 약자. 20피트(약 6m) 규격 컨테이너 상자를 세는 단위).

신항은 기존 남항 및 내항에 비해 운항거리가 최대 4㎞ 이상 짧아 선박 운항에 경제적이며, 211만8천㎡의 드넓은 배후단지를 보유하고 있어 항만물류가 활성화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와 비교우위가 있다.

인천신항 개장은 우리나라의 물류비즈니스 시장 여건과 패러다임을 변화시켜 비싼 내륙운송 비용에도 불구하고 부산항을 이용해야만 했던 수도권 화주들의 내륙수송 물류 비용을 절감시키는 것은 물론, 글로벌 가격 경쟁력 제고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남항 아암물류2단지 전면 해상에 건설 중인 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은 1·2터미널로 이원화된 운영으로 노선·터미널 확인 등 여러 면에서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던 한중 국제여객선·크루즈선 이용객들의 불만을 완전히 해소할 것이다.

새 국제여객부두는 카페리 7선석과 크루즈 1선석을 포함해 총 8선석을 개발 중이며, 이 중 크루즈 부두는 15만t급 초대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전용부두이다.

국제여객부두 배후부지는 서해안에 인접한 입지적 특성을 반영해 물의 도시(Water City)를 콘셉트로 하는 레저 데스티네이션으로 조성되며 도심 수변공간(Waterfront) 조성, 다양한 매력 포인트(Attraction) 유치를 통해 독특(Unique)하고 흥겨운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할 것이다.

 이로 인해 인천항이 우리나라 이미지와 위상을 제고하는 대한민국의 랜드마크이자 동북아시아의 해양관광문화 거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같이 오는 2016년 말 새롭게 통합국제여객터미널이 마련되게 되면서 기존 국제여객부두와 터미널 활용 방안을 마련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통합국제여객터미널 운영이 정상궤도에 오르게 되면 주변 항만과 도시의 모습이 많이 변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이 문제는 신설 국제여객터미널의 활성화, 주변 항만과 도시 기능의 조화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최적의 활용 방안을 마련하고 추진해야 한다.

연안부두는 백령·연평도 등 서해 도서민과 관광객을 안전하게 운송하는 해상교통로의 중요한 거점으로서 공익적 기능과 함께 주변 상권의 중심권 역할을 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할 때 앞으로도 변함없이 도서민과 관광객의 발이 되고 지역경제 활성화를 견인하는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추진돼야 한다.

#인천항과 함께한 인천세관 130년
정확히 130년 전인 1883년 인천의 개항과 함께 인천세관이 설립됐다. 그 후 인천세관은 제물포라는 작은

   
 
어항에 불과했던 인천지역의 발전을 선도하며 오늘날까지 역사를 써 내려왔다.

인천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됨에 따라 부산(1876), 원산(1879)에 이어 1883년에 개항됐다.

일본이 지속적으로 인천 개항을 요구한 지 3년 8개월 만에 결정된 일이다. 조선정부는 인천의 정치·경제·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인천의 개항을 꺼렸고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이 소요됐다.

개항 초기에는 관세에 관한 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상인은 무관세로 일본 상품을 들여와 국내에서 판매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국내 상인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정부는 점차 관세의 중요성을 깨닫고 1882년 5월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 최초로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명문 규정을 마련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기관으로서 인천세관은 1883년 6월 16일부터 징세업무를 시작(원산, 부산 순으로)했다. 명칭도 현재의 세관이 아니라 해관(청나라의 명칭)이었다.

청나라의 영향으로 청에서 추천한 묄렌도르프가 총세무사(징세업무총괄)로 임명됐고, 이후에도 열강의 역학구도에 따라 외국인 관리들에 의해 세관이 운영됐다.

개항 초기부터의 인천세관장을 살펴보면 한국인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1905년까지는 영국·독일 등의 서양인들이 세관장으로 부임해 근무했으며, 1905년 이후부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세관장으로 임명됐다. 열강에 의한 수탈의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다가 광복 이후 1947년 2월에서야 비로소 한국인 최초로 김준덕(1947년 2월~1948년 10월)씨가 인천세관장으로 부임했다. 6·25전쟁 후 전쟁으로 인해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빈약한 기존 생산시설마저 완전히 파괴돼 경제 이전의 상태에 머물게 됐다.

수출입은 원시적인 물물교환의 형태였고 그나마도 생산력과 경험이 부족해서 대부분 외국 상사에 의해 주도됐다. 인천세관의 역할도 생필품 수입 등으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1960~70년대 산업발전기에는 정부의 수출주도형 경제발전 전략으로 수입통관제도를 긍정(포지티브, Positive)에서 부정(네거티브 시스템, Negative System)으로 전환, 수입규제가 강화됐다.

 수입되는 물품도 생필품이 아닌 수입 원자재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수출시장도 다변화돼 대미·대일 수출 의존도가 낮아지고 유럽·중동 시장 수출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1980년대 인천항은 부산항 등과 비교해 갑문식 도크 운영으로 신속 통관에 제약이 따른다는 약점이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인천세관은 당일 면허제, 경미한 오류 선면허 후보완 원칙, 야간·휴일 비상근무조 편성 등으로 관내 수출업체와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구축해 수출통관에 지장이 없도록 조치했다.

1990년대 이후 중국의 대외 개방으로 대중국 교류가 확대됐다. 인천-웨이하이(威海) 페리 항로가 개설된 것을 시작으로 1992년 한중 국교 정상화로 수출입 화물이 다양해지고 급속도로 증가했다.

현재 인천항의 주요 수출품목은 기계·자동차·전자기기이며, 수입품목은 유류·전자기기류·철강금속 등이다.

이렇듯 인천의 역사는 인천항의 그것과 맥을 같이하고, 인천항은 개항부터 세관과 밀접하게 관련됐다. 인천의 미래를 찾기 위해 인천세관의 130년 역사를 되짚어 보는 일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