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한 여름이다. 연일 최고치를 갱신하는 수은주가 불볕더위란 말을 실감나게 한다. 전력난까지 겹쳐 최악이라 올 여름은 휴식도 피서도 만만하지 않다.

인파 복잡한 휴가철 피서지가 내키지 않아 집에서 보냈다. 예전처럼 휴가 여행에 들뜨지도, 기대도, 기다림도 없어진다. 나이 먹은 탓인가, 그냥 집이 제일 편하다. 최대한 간편한 복장으로 세상사람 시선 신경 쓸 일 없어 뒹굴뒹굴 게으름을 즐겼다.

낮에 집에 있어 보니 의외로 고요한 세상이다. 나가면 곧바로 큰길과 불과 몇십 미터 거리인데 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쨍한 햇볕이 베란다 유리창에 꽂히듯 내리쬐어 블라인드를 쳤다.

바람에 흔들리는 블라인드에 햇살이 춤을 추고 그것마저 설치미술처럼 눈요깃감이다.

 간간이 매미가 정적을 깬다. 이 녀석들도 배려가 있어 적막을 즐길 틈을 준다. 무료하고 권태로운 휴식 같지만 더위로 축 늘어진 심신을 보양하는 데 이 방법도 그만이다.

애들이 커서 성년이 되니 휴가는 각자 간다. 큰놈은 해외로, 작은놈은 친구랑, 평소처럼 휴가 스케줄도 바쁘다. 그래, 이제는 나도 혼자 즐겨 보자. 굳이 함께해야 맛인가. 나 편한 대로 즐기는 시간이 휴가지 싶다.

뭐 하실 거죠? 어디로 가실 계획이세요? 남은 엄마가 부담스러운지 캐묻는 애들에게 작정한 곳이 있으니 절대 염려 말고 휴가 잘 보내고 오라 했다.

어디가 피서지로 좋대요. 어디가 먹을거리가 좋대요. 몇 마디 성의를 보이는가 싶더니 자기들 계획에 들떠 곧 사그라진다. 아무튼 이번엔 고스란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수양하러 먼 길 가지 않고 쉬러 간다고 차 속에 몇 시간씩 갇혀 있지 않고도 불볕더위를 피하는 방법을 생각해 놓았다.

매일이 바쁘고 매일이 부산했다. 엄청난 성과를 내는 일이 아닌데도 진중하게 나를 돌볼 시간이 없었다. 덥다덥다 하면서 예전처럼 또 피서를 위해 길을 나서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가를 위한 일이라 해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사춘기 애들 반항처럼 슬그머니 심사가 고약해졌다.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을 거야. 재충전을 위한 힐링이니 이런 고상한 말은 애초에 막아버릴 거야.

누가 강제하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의연해지자 다짐을 했다. 그동안 많이 바빴다. 그래서 견제도 다짐도 없는 정신의 무중력 상태가 그리웠나 보다.

정말 일주일을 느슨해질 대로 느슨하게 풀어져 보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누웠다가 방바닥 먼지가 신경쓰이면 땀범벅이 되도록 청소하다가 옛날 사진첩을 꺼내 지나간 세월여행을 하다가 이 책 저 책 집어 들고 읽다가 홈쇼핑 쇼호스트 말발에 꽂혀 물품 주문도 하다가 그러다 보니 후딱 일주일이 지났다.

생각해 보니 늘 긴장이었던 것 같다. 잘 해야 하고 반듯해야 하고 매사에 모범이어야만 안심이라 경직된 통제가 순환에 장애를 가져오고 곳곳이 뭉쳐 근육통이 생겼다. 한 오십 년 그리 살았으니 이제 환기창 하나, 아니 몇 개쯤 열어 놓아도 괜찮지 싶다.

심신을 건강하게 유지하자는 의도로 가장 더운 삼복에 휴가기간을 만들었다면 의도대로 잘 따라 다스리면 되는 것이다.

혈이 잘 흘러야 건강한 몸일 테니 너무 빡빡하게 다그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바깥은 여전히 뜨겁다. 그래도 집 안에서 보낸 일주일이 시원하다 느껴지는 것은 마음을 풀어주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의미를 부여해 본다.

체온을 넘는 살인적인 더위다. 장작불에 달구어진 가마솥이다. 전투적인 표현으로 올 여름 더위를 불평한다.

그래도 시절은 제 길을 벗어나지 않고 간다. 입추도 지났고 말복도 지났다. 맹렬한 기세로 도가니탕을 만들어 내는 불볕더위도 사그라질 때가 가까웠다.

떠났던 못 떠났던, 휴식을 했던 못 했던 여름은 끝자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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