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했던 여름의 끝자락이다. 절기상 처서도 지났다. 열대야가 사라지면서 바람결에 까슬함이 느껴진다. 밤까지 이어졌던 열기가 식으니 생각이 조금씩 차분해진다. 격정과 무기력에서 벗어난 안정이다.

가을은 정서의 깊이가 온유해지는 시간이다. 세상을 대하는 눈빛이 어느 계절보다 부드러워 부산스럽지 않다. 차분한 마음으로 책을 읽자고 한다. 그래서인지 독서 캠페인은 가을이 성수기다. 사색과 독서로 마음의 양식을 쌓아가자는 계몽이 식상한 구호 같으나 여전히 새겨들어 볼 가치가 있다.

지금은 생각의 주인이 나이기보다는 흡수하고 주입하는 객체의 나가 대세인 시대다. 나부터도 사지선다형의 시험에 길들어진 세대라 내 주장을 펼치는 데 어색하다.

 인터넷과 대중매체의 위력이 워낙 막강한 세상이라 몇몇 사람의 생각에 획일적으로 동조하며 조성된 의식이 곧바로 여론이 되고 있다. ‘당신의 의견을 기술하시오’에 당황한 경험이 한두 번은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사색은 삶과 사람에 더해 삼라만상에 대한 성찰이다. 인문사회과학이라고 분류하는 학문의 영역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는 학문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수학처럼 정답이 똑 떨어지는 학문이 아니다 보니 명확한 기준을 정하기가 애매한 면도 있다.

성찰이란 말을 쉽게 입에 올리지만 쉽지 않은 수양이 필요한 단어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 사고의 폭을 넓히고, 문제 해결을 위한 토론에서는 열린 자세를 갖추고, 직접경험으로 다져진 견문 등이 잘 어우러져 녹아나온 엑기스를 성찰이라 칭해야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대세까지는 아직도 한참 멀지만 근래 몇 년 사이에 마니아층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한 인문학 강연장에서 들은 강사의 말에 공감이 갔다. ‘자연과학을 잘 하는 학생은 머리가 좋은 아이입니다. 수학 점수가 좋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육은 정답이 없는 인문과학을 정답이 있는 학문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주입식으로 암기화 시켜버린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도 머리 좋은 아이가 상위 점수를 석권해 버립니다.

사고력과 논리력·감수성이 어우러져 인간에 대한 이해와 세상을 보는 눈이 뛰어나야 인문사회학에 탁월한 사람이 될 수 있는데 제도교육에서 이를 무시하고 주입식으로 점수화시켜버렸습니다.’ 강사는 이런 교육의 부작용으로 국회와 방송국 심야토론을 예로 들었다. 인문학 토대가 없는 한국에서 토론문화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한다.

유태인 엄마는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선생님에게 어떤 질문을 했니? 우리나라 엄마는 수업시간에 선생님 말 잘 들었니? 교육의 관점이 다르다 보니 우리는 주입식교육이 대세일 수밖에 없다. 3살 전후의 아이가 하루종일 한 말을 녹음해 들어보면 가장 많이 쓴 단어가 ‘엄마’이고 다음이 ‘왜’라고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아이의 질문에 엄마는 성의 있는 답을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양질의 육아를 하고 있는 셈이다. 몰라도 돼, 커면 다 알아, 심지어는 그만해 라고 야단을 치기도 한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 되면 아이는 ‘왜?’ 질문을 스스로 접게 되는데 이는 사유하는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무서운 일이다.

우리나라의 가구당 1년 도서구입비가 2만 원 정도라고 한다. 커피 서너 잔 값이다. 도서구입비의 12배가 넘는 25만 원을 연간 외식비로 쓴다는 통계 자료도 있다. 서점이 멸종위기 업종이라는 출판사의 한숨이 실감난다. 책에는 저자의 생각이 담겨 있다.

시대를 초월한 공감과 가치가 담겨 있는 책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고전으로 추앙받는다. 독서를 권장하는 계절을 핑계 삼아 좋은 책 몇 권 읽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시절상 처서는 늦더위가 물러가는 때라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을 타고 온다.’라는 말이 있다.

 가을이 드는 계절의 길목이다. 카랑한 햇살이 한여름과 다르고 말간 하늘에 구름이 가볍다. 어둠이 내리면 풀벌레 소리도 은은하다. 무엇을 하든 좋은 계절이다. 생각의 주인이 될 준비를 촘촘히 해 보기에도 좋은 계절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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