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고 뜨거운 입술을 가진 주인공은 변덕이 심하고 까다로워서 한 달 두 달 세 달, 내내 마음을 후끈 달궈놓고도 호락호락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조마조마 흥미진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어느 작가가 여름을 묘사한 글이다. 읽는 순간 딱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예카테리나2세다. ‘변덕을 부리다’를 단순하게 풀이하면 지조 없는 경박스러움으로 연결되겠지만 여제에겐 무례한 해석이다. 세상은 은유가 더 많은 곳이고 상대의 내공을 읽을 줄 아는 예의도 필요하다.
야금야금 여름이 기울기 시작하는 9월 중순에 러시아를 다녀왔다. 러시아도 아직 한낮은 뜨겁고 녹색이 싱그러웠다. 최저기온이 0도 내외라며 사전 미팅에서 알려준 정보는 믿을 게 못 돼 준비해 간 패딩 코트는 여행가방 속에서 구겨진 채로 짐스러웠다.
부피가 커 여행가방 속을 점령한 상태라 다른 여행물품들은 간추리고 간추려 비좁게 챙겼다. 선입견이 준 부작용이다. 보드카에 취한 술주정뱅이와 음흉하고 무뚝뚝한 국민성에 스킨헤드족의 공격을 두려워하며 긴장했었는데 돌아올 때는 매혹적인 나라라고 모두들 즐거워했다.
공식 일정이 잡혀 있어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패키지여행처럼 눈도장 찍고 바로 떠나고 또 다른 곳 찍고 하는 겉핥기식이 아니라 여유있게 머물면서 두 도시를 만났다. 상인의 도시 모스크바보다는 문화예술이 녹아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내 마음을 깊게 흔들었다.
100여 개의 운하와 365개의 다리가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웅장하고 힘 있는 바로크 양식과 우아하고 화려한 로코코 양식의 건물들이 조경이 잘 된 도로와 공원과 어우러져 품격이 있었다. 유명한 문학 작가가 많을 수밖에 없는 생태적 이유인 것 같다.
국민적 작가로 추앙받는 푸시킨을 비롯해 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를 기리는 연구소·기념관·박물관이 한 도시 안에도 여러 개 있어 놀랐다. 작가에 대한 예우를 자부심으로 여기는 러시아 국민들은 생활 속에서 문화와 예술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어 부러웠다. 공원에서 시를 낭송하는 노인들도 일상 대화 속에 멋진 싯구나 문장을 자연스럽게 인용하는 사람들도 러시아의 보통사람들이다.
한국학연구소를 방문해서는 더 감동이었다. 동방의 작은 나라였던 구한말 시절부터 한글을 연구하고 우리 고전을 번역해 출간한 곳이다. 향가에서부터 시작한 번역본이 10만 부나 팔렸다는 말에도, 운율 따라 노래하듯 낭송하는 고려가요를 들으면서도 울컥 했다. 춘향전을 비롯한 고전소설뿐만 아니라 현대작가들까지 다양한 우리 문학작품이 러시아어로 태어나 그곳에 있었다.
러시아 역대 왕 중 황제로 추앙받는 왕은 둘인데 늪지대인 이곳에 도시를 건설한 표트르 1세와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국력을 키운 여제 예카테리나2세다. 장군인 정부와 힘을 합쳐 남편이었던 표트르3세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고 한다.
러시아 왕국도 아닌 프로이센 작은 공국의 가난한 귀족이었던 그녀가 러시아로 시집와 대제의 칭호를 받는 자리에 앉게 된 데에는 국민적 지지와 귀족들과의 협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매혹적이고 자존심 강하며 꼿꼿이 의연하고 지적 갈망에 열심이었던 그녀는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국력을 키우고 문화예술을 꽃피웠다. 그녀의 실정을 파내 흠집 내는 측근도 있었고 복병도 숨어있어 황실은 가파른 절벽의 난간에 서 있는 것처럼 긴장으로 빽빽했을 것이다.
여제는 사람과 소통하는 법을 알았다. 그들의 마음을 얻는 방법이 당근과 채찍임도 꿰찬 여걸이다.
허나 이방인으로 남편도 없었던 여제는 수시로 마음이 허했다. 섬세한 감성이 여제를 안목 있는 컬렉터로 만들었고 후대의 러시아국민들의 자부심인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태어난 모태가 되었다. 철저히 혼자라 허하고 외로울 땐 모아온 그림과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마음을 힐링했다 한다.
후대에 더 모아진 것이겠지만 한 작품당 1분씩 하루 24시간을 꼬박 감상해도 5년이 더 걸린다는 엄청난 예술작품은 가진 박물관이다. 그들의 자부심처럼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이름을 날리지만 영국의 대영박물관이나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처럼 약탈품이 없는 순수 컬렉션이라고 한다.
열정과 변덕과 혹하게 만드는 친화력으로 궁정 안팎의 백성들 마음을 후끈 달궈놓고도 여제는 호락호락 대할 수 없는 근엄이 있었다. 여제는 자줏빛 새벽 같이 오묘한 여자다.
독일인의 피를 다 뽑아내고 러시아인 피로 자신의 혈관을 채우고 싶어 할 만큼 러시아를 사랑한 황제다. 여제에게 배운, 칭찬은 큰소리로 야단은 작은 소리로 하라는 양육철학을 새겨 담아왔고, 더 많이 알면 더 많이 용서하게 된다는 명언도 안고 왔다.
매혹이란 단어가 맞춤으로 어울리는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한순간 홀렸다가 이내 잊고 싶지 않다. 그녀가 이룬 문예부흥이 내 심장에도 싹을 피워 누군가의 삶을 위로해줄 수 있는 작품 하나 쓰고 싶어진다.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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