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멋진 계절, 가을의 중간 10월이다. 온화해진 햇살과 시린 하늘이 연가를 부르고 시를 쓰게 만든다. 온난화 탓에 봄·가을이 사라져간다느니 간절기로 전락해 존재가 미미해졌다느니 기후 변화에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보이지만 가을은 가을이다.

가을, 흔히 남자의 계절이라 한다. 심리적인지 생리적인지 사회현상인지 분야마다 전문가가 열변을 토하고, 정서적 공허를 잘 이겨내는 계절병을 치유하려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비법도 처방도 친절하다.

진영이 할배 이야기다. 북망산천이 그리 좋은지 먼저 훌렁 가버렸으니 할마이 제사고 추모고 다 필요 없다. 할머니 사진만 부둥켜안고 소주잔으로 날을 새워 자손들 마음을 애잔하게 하시더니, 우리 시아부지 요새 늦바람났어. 진영엄마가 키득키득 웃는다.

햇살 좋은 가을날, 토속음식을 정갈하게 코스로 내오는 음식점에서 친구 몇 명이 점심을 먹었다. 말 없고 무던해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진영엄마가 감자 수제비를 뜨면서 불쑥 한마디 했다.

무던한 진영엄마의 말에 의아해 다들 진영엄마를 쳐다봤다. 식사 다하고 차 마시면서 얘기 할 테니 우선 맛있게 먹자고. 궁금하지만 꾹 눌러놓고 맛난 음식에 순종하는 아줌마들답게 우선 잘 먹어뒀다.

진영이 할아버지는 경상도 산골분이시다. 무뚝뚝의 진수를 남자 자존심이라 여기고 사셨던 분이라 표정이 엄하고 딱딱해 늘 어렵고 긴장되는 시아버지셨고 당연히 손자손녀들도 할아버지를 반기지 않았다.

동서끼리 모이면 우리 아버님 어찌 애를 5명이나 만드셨는지 신통해. 불경한 뒷담화로 흉을 보곤 했다는데 요샌 다른 분으로 빙의되신 것 같다며 또 킥킥 웃는다.

무심한 남편 탓인지라 아픈 내색 못하고 소다로 속쓰림을 달래시던 시어머니는 엉뚱하게 폐암으로 돌아가시고 75세에 홀아비 되신 아버님은 합가를 원하지 않았다. 효자 아들 진영이 아빠가 모시고 와서 겨우 두 계절이나 지났을까, 우리 아버님 정분났다고 입 무겁기로는 금메달감인 맏며느리 진영엄마가 배신을 때렸다.

다 큰 손자손녀도 자기 일도 바쁘고 직장의 중추책임자인 아들도 바쁘고 원래 사근사근하지 못한 고부간도 어색하셨는지 답답해 바람 쐬고 오겠다며 시작한 외출이 어느 날부터 길어지셨다네.

이것저것 관심이 많아지고 외모를 가꾸고 거의 쓰지 않던 휴대전화를 애지중지하시고. 땡볕 마다하는 농부가 염치없이 가을걷이 뭐 할라꼬 기대하노, 하시던 분이 화장품을 그것도 썬크림을 몰래 바르다가 며느리에게 딱 걸렸다네.

알뜰한 분이라 목돈도 좀 있으실 것 같고 농토와 선산도 있어 상속분쟁 나게 생겼어. 진영엄마가 손 사레를 치며 심각하길래 ‘사랑과 전쟁’ 진영이 할아버지 새장가 편 나오겠다고 놀렸다.

“우리 아버님이 원래 부지런하신 분이라 새벽에 일어나시면 화장실 들락날락 하시고 베란다 화초 물주시고 이른 새벽 노인네 잔기침 소리도 신경쓰였는데 지금은 고요하다. 왜긴, 방에서 전화통화 하셔 애인이랑. 문자도 하시고 우리 아버님이 낭만 할배 되셨다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리톤 김동규의 매력있는 목소리에 한혜경 작가의 서정적인 가사가 환상의 짝꿍이 되어 10월의 대표곡이 된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노래가 지금 우리 아버님 연애 주제곡이라면서 진영엄마가 갑자기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진영이 할배 새장가 가시면 며느리 친구 셋이서 이 노래 축가로 불러주자. 우리도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우리 아버님, 여자 친구와 행복하게 오래 지냈으면 좋겠어. 돌아가신 어머님껜 죄송하지만. 다음 주에 단풍 고운 산에 두 분 가실 때 솜씨 부려 맛있는 도시락 선물해 드릴 게요. 며느리가 싸 준 도시락으로 프러포즈하세요 했더니 쑥스러워하면서도 은근 좋아하셔.”

나 좋은 며느리 맞지 하는 진영엄마의 마음이 이심전심이 되어 진영이 할배의 ‘10월의 멋진 어느 날에’ 사랑이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10월은 절기 중 가장 멋진 때이고 사랑하기에도 좋은 시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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