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훈한 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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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한 연말
소설가/기호일보 독자위원
  • 기호일보
  • 승인 2013.12.24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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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차다. 도로야 말끔하지만 쌓인 눈이 얼어있어 체감온도가 만만치 않은 날씨다. 차에서 내린 할머니는 안색이 좋지 않다. 빈속에 차를 타 멀미가 심하다고 하신다.

산곡동에서 구월동 YWCA 건물까지는 차를 타고 이동하기에 긴 시간이 소요되는 거리가 아니다. 기껏해야 20분 남짓 걸리는 시간인데 많이 힘들어하신다. 몸이 건강하지 않아 조그마한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이 오는 모양이다.

할머니를 만나게 된 계기는 연탄봉사를 통해서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좋은 일에도 궂은일에도 상부상조하면서 살자고 만든 소모임이 하나 있다. 사랑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는 옛말에서 따온 ‘다솜회’이다.

 제철 별미를 맛보는 맛집 탐방도 즐겁고, 봉사활동에 마음을 더하는 일도 보람이 있어 모두가 열심인 모임이다. 인원이 적다보니 친밀이 깊어 함께하는 활동에 적극 동참한다.

소소한 봉사도 하지만 범위가 넓어지면 인맥이 필요하다. 주변에 좋은 분들이 포진하고 있어 필요한 인적 자원을 협조받고 협력도 하면서 지금까지 잘 유지되고 있다.

최근에 의료보험공단 부평지사와 힘을 합쳐 부평지역 영세가구에 연탄과 겨울을 날 부식배달을 했다. 과거 절대 권력의 중심이었던 영부인과 이름이 같은 할머니 댁을 방문했다. “애 낳고 석 달 뒤에 남편이 죽었다오.

핏덩이 아이를 들쳐 엎고 남쪽지방으로 일자리 찾아 내려갔는데 전입신고서에 동사무소 직원이 내 이름을 이렇게 바꿔놓았어. 그래서 영부인이 된 거야요.” 허울 좋은 영부인이라며 웃는 할머니 모습이 쓸쓸했다.

받는 것에 감사함을 표하는 할머니를 보면서 오히려 내가 민망했다. 대단할 무엇도 아닌 겨울 한 철 지낼 만한 연료와 부식인데 할머니에게 공치사를 들어 민망했다. 그냥 돌아 나오기가 계면쩍어 말벗이 그리운 할머니 이야기를 오래 들어 드렸다.

 할머니의 고단한 세상살이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져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허리가 병신이라 뭘 짚지 않으면 꼬부라져 보기 흉하지요?” 가쁜 숨을 몰아쉬는 할머니가 안쓰러웠다.

긴 생을 나누어 보면 누구나 좌절도 하고 실패도 한다. 승승장구만 하는 사람이 없듯이 내리 실패뿐인 삶도 없을 것 같은데 엎친 데 덮친 재앙이 다리 걸어 넘어뜨리면 벌떡 일어서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관리 못했으니 당신 탓이오. 냉담해질 수 없는 사정이 분명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머니 말을 자르고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가난의 대물림을 체험하면서 살고 계신 할머니지만 생각만큼은 밝고 건강했다. 좌절이 일상이라 아무렇게나 살다 가게 내버려두라는 이웃을 돌보고 참견하고 버려진 화분을 모아 배추를 키우고 빈터에 채소를 심고 꽃씨를 뿌려 키우는 모습을 이야기로 듣고 실제로 보면서 할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었다. 이름 내 건 후원단체는 접어두고 이사로 몸담고 있는 YWCA에 할머니를 수혜자로 추천해드렸다.

인천YWCA에서 한 해 동안 녹색나눔장터를 열어 수익금을 모아 연말에 불우이웃성금을 전달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얼마의 후원금은 쉽게 낼 수 있지만 수고가 드는 녹색나눔장터는 여러 번에 걸쳐 시간을 내고 기부를 하고 찬조물품을 가져와 직접 참여해 수익금을 만들어 기부하는 활동이다.

 수고스러움이 있었기에 애정이 깊어지고 마음이 따뜻해지고 가슴 뿌듯해지는 행사다. 여기서 모금한 금액으로 연말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분들에게 성금을 전달한다.

할머니는 그냥 받기가 미안하다고 준비해 온 먹을거리를 나눠주신다. 점심상을 봐 놨으나 울렁증이 있으셔 따끈한 국물 한 수저도 뜨지 못하셨다. 할머니를 안아드렸다. “할머니, 이왕지사 영부인 이름을 가졌으니 마음은 영부인처럼 우아하게 폼 나게 사세요.

무절제한 이웃 따끔하게 혼도 내시고 다독여주시기도 하면서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세요.” 할머니를 배웅해드리고 나니 마음이 푸근해진다. 올 한 해도 잘 살았구나, 위안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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