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힘들었어요. 이제 아무 생각 없이 곯아떨어져 자고 싶네요.’ ‘그래요 푹 자 두세요. 당선이든 낙선이든 또 분주한 하루가 될 테니까요.’ 밤 열두 시가 넘었으니 정확히 선거날이다. 후보자 아내로 체력 고갈 상태가 된 그녀와 나눈 마지막 문자통화 내역이다.
칭찬에도 비난에도 면역이 될 세월이 흘렀건만 그녀는 울컥 속이 상하고 그래도 담담한 표정을 유지해야 해서 힘에 부칠 때가 있다 했다. 세상의 잣대로 일찍 출세가도를 달린 남편 덕에 유명세를 치러야 했으니 낱낱이 세상에 공개되는 가족의 사생활까지 견뎌내는 것쯤은 유권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한다.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남편의 열정이 가치 있고 진지해 보여 동지애로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가끔은 외로움에 가슴이 서늘해지기도 한다며 고개를 숙인다. 아들이 그랬단다. “장남 그만 하고 싶어. 나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우리 집과 인연 끊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그러니 내 목 좀 그만 졸라요. 제발.”
남편의 불운으로 빚더미에 올라앉은 그녀는 두 아들을 잘 키웠다. 아니 잘 커 줬다. 대기업 입사 2년차인 스물아홉 살 아들이 목이 메어 눈물을 터트렸다 한다.
장남의 책임감 때문에 떨쳐내지 못한 빚이 아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데도 무기력과 우울증으로 남편은 집 밖을 떠돌며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생활을 한다 했다. 엄마의 가슴을 에는 말들을 쏟아 놓고 아들이 방문을 닫더란다. 연휴라고 집에 내려와 늦은 저녁상을 마주한 자리에서 아들은 속에 눌러 담아둔 말을 폭풍처럼 쏟아냈다 한다.
다음 날이 그녀의 생일인데 뜬눈으로 새운 몸은 천근이고 마음도 절망의 늪에 빠져 누워 있는데 현관문 여는 소리가 나기에 ‘괘씸한 놈 이제 지가 돈 좀 번다고 키워준 공은 개나 줘 버렸는지 이래 어미 마음을 아프게 하고 가는구나.’ 눈물을 쏟아냈다 한다. 아들은 과일이며 케이크며 엄마의 생일상을 봐 와서 잘 드시고 건강하시란 말을 남기고 떠났단다.
그날 밤, 아들 전화를 받고 그녀는 폭풍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엄마, 그 빚 내가 다 갚을 거야.
그러니 엄마는 마음 졸이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요. 우리 집 내가 일으킬 거야. 동생도 잘 건사해서 내가 다 잘 되게 이끌어 줄 거야. 엄마, 걱정하지 마. 계획하고 노력해서 우리 집도, 내 삶도 멋지게 일으켜 세울 테니 두고 봐 엄마.
그리고 어제 일 미안해.” 한잠 못 자고 밤을 새운 아들은 굳은 결심을 했다며 엄마도 밤 꼴딱 새웠을 테니 오늘밤부터 푹 자라고 위로를 하더란다.
진도 팽목항에 약사회에서 봉사약국을 운영하는 약국에 자원봉사를 다니는 그녀. 이곳 인천에서 진도까지는 길이 멀어 가고 오기가 쉽지 않다.
그녀는 약국 문을 닫고 일요일에서 월요일까지 자주 진도를 찾아간다. “그냥 제가 가면 꼭 실종자 한 분이라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요. 처음 여기 왔을 때 다섯 명, 두 번째 한 명, 그리고 오늘 한 명 실종자를 수습했어요. 아! 지금 정말 기적적으로 292번째 희생자가 수습됐어요.”
그녀는 사실 봉사약국 일은 별로 할 게 없다며 실종자 가족분들과 자원봉사하시는 분들에게 소화제·진통제·두통약·피로회복제·파스·연고·청심환 등을 드리는 일이 고작인데 내가 오면 희생자 수습 소식이 들리니까 남은 가족들이 오히려 고마워한다며 수줍어한다.
“이제는 텅 빈 체육관에 얼마 남지 않은 실종자 가족들과 함께 침몰 현장의 바다를 바라보며 아파하고 기도하며 함께 밤을 지새우는 거예요.
낮에 수습한 단원고 선생님의 아버님·어머님께서 고맙다고 인사하러 오셨네요. 정말 기도의 힘인가 봐요. 그분들이 수습된다면 맘 같아서는 매일 오고 싶어요. 다음 주 일요일과 월요일에 다시 오려고 해요.”
선거날부터 일요일까지 5일 간격에 내 주변 그녀들에게 있었던 일이다. 인생 다섯 가지 맛이 오미라는데 쓴맛·신맛·짠맛·매운맛·단맛이 골고루 조화롭게 익어가는 장독이 여자의 삶이라면 좀 신파로 들릴라나.
오미 속에 내가 만든 맛도 분명 있을 테니 그녀의 그녀는 나일 수도 있다. “우리 집 열무김치가 맛있게 잘 익었어요.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여서 양푼비빔밥 차릴 테니 다들 오세요. 그날 밥심·입심에 세상 오지랖 넓은 아줌마 수다도 풀어내 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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