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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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勝)
소설가/기호일보 독자위원
  • 기호일보
  • 승인 2014.07.08
  •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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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의 세월은 층층시하 다사다난했다. “어려운 고비가 다뿍 한도 초과로 닥쳐도 사단이 나면 비켜가든, 한판 붙어 정면 돌파를 하든 또 살길이 생기더이다.”

세상과의 대련으로 키워진 강단은 다부져 웬만한 일은 발길질 서너 번이면 끝, 정리되더라고 한다. 낙낙한 미소 뒤에 벅찬 일도 힘겨운 사연도 긴하지 않은 척 앙다물고 있는 그이의 가슴이 보여 안쓰럽기도 하다.

“시댁 식구 뒤치다꺼리하느라 한세상을 보냈는데 어쩌것소. 어질러 놓은 뒷설거지를 삼십 년 했으니 달인 칭호나 받고 생색내 봐야지.”

그리 사는 것도 당신 팔자요, 하고 누가 거들면 가슴에서 확 불기둥이 솟는다며 내가 전생에 뭔 죄를 그리 옴팡지게 지었는지 도무지 기억에도 없는 원죄로 옭아매지 말라며 가슴을 친다.

아홉 살 많은 남편의 절절한 사랑고백으로 명동거리 멋쟁이로 미모를 날리던 그이는 대학교 졸업을 목전에 둔 초겨울에 결혼을 했다. 잘나가던 남편은 시댁 재산을 시작으로 처갓집 재산까지 날름날름 삼키더니 집에 빨간 딱지가 붙던 날 홀연히 사라졌다.

순식간에 신파극 여주인공으로 전락한 그이는 변방으로 내몰려 볼꼴, 못 볼꼴 온갖 일을 홍수로 겪고 아수라 시댁의 가장이 됐다. 충격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된 시어머니는 며느리 잘못 들여 집안에 망조가 들었다고 핍박이고, 시동생은 주저앉은 집구석 때문에 인생 쫑났다고 주사를 부리고, 시집 간 시누이는 친정 때문에 시댁에서 기를 못 핀다고 온갖 독설을 퍼붓고.

스물일곱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그이는 초특급 슈퍼우먼이 돼 살아냈다.

“눈물 빼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데요. 돈 벌어 삼시세끼 시어머니 밥상 차려야지, 내 새끼 키워야지, 시동생 생떼에 술값 내놓아야지.”

그이는 보통 사람의 생보다 몇 배는 더 분주했고 어깨에 멘 짐이 힘겨워 숨비소리 같은 새된 숨을 쉬며 살았다. 생존을 위해 뛰어든 세상에서 받은 상처와 눈물이 결구가 돼 가장의 책임감으로 바닥까지 훑으며 돈을 번 덕으로 안정이 됐다.

그이가 하는 말, “세상은 살아보니 토너먼트 게임이 아닙디다. 내가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완패를 했지만 세상 숱한 일들과 싸워서는 이기는 일이 많았지요. 세상과의 샅바싸움에 요령도 붙고 근육 힘도 키워지니 세상이 두렵지 않게 되더구먼요.”

한쪽에서 몰패를 해도 이길 경기는 늘 준비돼 있는 것이 인생이라는 그이의 말에 공감이 간다. 미약한 능력을 키워 나갈 때도, 종잣돈을 만들 때도 자신하고의 싸움에서 고비를 넘겨야 끝이 보인다. 사람과의 관계도 물리적 싸움보다 더 중요한 소통의 기술이 싸움에서 승자가 될 수 있는 무기다.

그이의 두 아이가 우여곡절 끝에 자리를 잡았다. 예민한 사춘기를 조금 일찍 겪으면서 엄마를 시험에 들게 만든 녀석들인지라 지금이 기특하다.

자식을 포함한 가족관계에도 공이 들어가야 씻김굿이 돼 서로의 마음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진정한 승자의 모습은 사람에 대한 관심과 배려와 존중인 것 같다. 그이는 늘 ‘가장 좋은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구절을 인용하며 달콤살벌했던 지난 세월을 조금씩 내려놓는다.

채웠다가 비우면서 여백을 만들어 가는 그이가 멋진 승자다. 그이가 기다리는 가장 좋은 때는 여백을 만들어 가는 지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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