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면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다. 기껏 아파트 놀이터에서 모래장난이나 그네며 미끄럼틀에 몸을 맡기는 게 고작이니 말이다.

그나마 게임에 빠져 휴대전화에 코를 박고 열심히 화면을 눌러대는 아이들에 비해서는 나은 편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우리가 커 왔던 어릴 적에 비해 행복한 아이들이다.

1960~70년대는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랬듯 아이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하루 종일 일해도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기 힘들었던 그때는, 그래서 아이들 스스로 컸을지도 모른다.

황해도에서 피란 내려와 인천에 정착한 부모들의 직업은 대개 두 가지다. 대성목재나 삼화제분 등 인근 공장에 다니거나 어부로 고깃배를 탔다. 엄마들은 굴을 따러 다니거나 노점을 전전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렇게 부모들이 떠난 텅 빈 동네는 아이들에게도 따분한 곳이다.

국민학교 때다. 대성목재(만석비치타운) 뒤 철길과 삼미사를 끼고 넓게 펼쳐진 바다 위 저목장(貯木場)은 만석동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대성목재와 동일방직 뒤편 철길에는 20여m 길이의 작은 철교가 있고 가끔 그곳을 화물열차가 지나갔다. 화물열차는 철교를 지나기에 앞서 아이들이 난간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속도를 늦춰 ‘멍텅구리’라고도 불렸다.

그 화물열차와 철교는 아이들의 담력을 실험하는 좋은 장난감이 됐다. 최소한 함께 어울리려면 화물열차 난간을 잡고 철교를 지날 정도의 담력은 있어야 했다. 철교에서 갯벌까지의 높이는 대략 10m 가량. 떨어지기라도 하면 죽을 수도 있었지만 누구 하나 마다하지 않았다.

화물열차를 타고 철교를 건너면 또 하나의 의식을 치른다. 이번에는 철교에 놓인 침목을 타고 건너야 하는 것. 침목 간 거리가 일정하지 않은 데다 그 사이로 보이는 10여m 밑에는 악마의 아가리 같은 갯벌이 오금을 저리게 하지만 일당들은 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지난다.

그렇게 철교 의식이 끝나면 지름 1.5~2m, 길이 15~20m 가량의 거대한 수입 원목 수천 개가 늘어선 바다 저목장에서 망둥이 낚시를 하거나 뛰어다니며 해가 저물 때까지 놀았다. 그렇게 만석동의 바다는 부모가 돌보지 못한 아이들과 함께했던 친구의 바다이기도 했다.

이제 철교가 있던 자리는 고가도로가 대체했고, 갯벌을 가렸던 뗏목도 사라졌지만 늘 그때의 여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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