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전 이 땅에서 올림픽이 처음 열리던 해, 우리 사회는 정치·경제·문화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시작을 우리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희망’이라 불렀다.

이듬해 고(故) 문익환 목사와 당시 대학생이던 임수경의 방북으로 통일운동의 불씨가 지펴졌고, 이어 민주화의 거센 저항 속에 첫 문민정부가 탄생했다. 이후 IMF 구제금융과 미국발 금융위기에 우리 경제도 침체일로에 빠져 비정규직이 전체 일자리의 절반을 넘어서는 시대가 됐다.

우리가 한때 ‘희망’이라 불렀던 ‘88둥이’가 만 26살이 되는 2014년, 그들은 지금 ‘88만 원 세대’란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이들과 동시대를 호흡하며 숨 가쁘게 26년을 달려온 기호일보가 이들에게 다시 ‘희망’이란 화두를 던진다. <편집자 주>

   
 

‘88둥이’는 섭외부터가 쉽지 않았다. 사회초년병의 하루 24시간은 마치 초 단위로 끊어 사는 것처럼 저마다의 일정이 빡빡했다. 약속 시간과 장소를 두세 번 바꾸고 나서야 5명의 88둥이를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다.

지난 2일 오후 8시 동인천역 인근의 복합문화공간 ‘콘서트하우스 현’에서 이들을 만났다. 늦은 시간 좀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사전 장소 섭외부터 공을 들였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것조차 낯설어 하던 이들은 인터뷰가 시작되자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하고픈 이야기를 쏟아냈다.

먼저 이날 만난 5명의 ‘88둥이’를 소개한다.

당희경. 인천에서 태어나 줄곧 인천에서 자랐다. 급여의 대부분을 저축하고 있는 5년차 직장인이다.
김두훈. 대학 4학년. 졸업을 앞둔 취업준비생이다. 방학이지만 취업 준비를 위해 기술연수원에서 자격증 취득을 준비하고 있다.

차혜림. 전문대를 나와 친구와 창업을 했다. 트랜스폼 웨어(조립형 옷)를 만드는 ‘다이애그널’이란 회사의 청년CEO다. 회사명 다이애그널은 ‘대각선’이란 뜻을 갖고 있다.

이선미. 포천시에서 태어나 13살 때 인천으로 이사를 왔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오는 12월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이기도 하다.

곽혜선. 부천시에서 태어나 지금은 용인시에 살고 있다. 전문대를 졸업한 뒤 4년제 대학에 편입해 패션디자인을 전공했다. 졸업을 앞두고 다시 휴학해 돈을 벌며 유학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들과 또래인 본보 정회진 기자와 입사 1년차 이창호 기자가 패널 겸 인터뷰어로 인터뷰에 참여했다.

-상당수 기성세대들은 지금의 20대를 ‘생각 없음’으로 정의하곤 한다. 하지만 지난해 말 한 대학생이 쓴 ‘안녕들 하십니까’는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당신들의 20대는 안녕한가.
두훈=현실사회에 대한 불만이 없다면 20대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괜히 페이스북 등 SNS에 속내를 드러냈다가 불만세력으로 낙인 찍히면 취업하기 더 힘들어질 것이란 걱정이 앞선다.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순응하고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혜림=상대를 쓰러뜨려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생존경쟁의 원리를 일찌감치 배우고 자랐다. 현실의 많은 젊은이들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지만, 그런 생각조차 할 시간도 없이 산다.

▶혜선=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기 전에 너무 많은 빚을 졌다. 대학 4년 동안에만 등록금을 포함해 거의 1억 원을 썼다. 모두 부모님께서 대주신 돈이지만 언젠가 값아야 할 빚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에 대한 강박감도 있는 것 같다.

▶선미=전문대를 나와 회계자격증을 따 바로 취업했다. 매일 철야 근무를 했지만 100만 원도 채 안 되는 급여를 받는다는 게 좀 억울했다. 그게 현실이었다. 과감히 직장을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지만, 한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행복하다.

▶희경=꿈을 잃어버린 것 같다. 지금은 통장에 얼마씩 저축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언젠가 꿈을 되찾게 된다면 그때 모아 둔 돈을 다 쓸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알약을 놓고 선택을 강요받는다. 빨간약을 먹으면 기계들이 만든 가상의 세계에서 평안하게 살 수 있고, 파란약을 먹으면 자각이 가능한 인간 도시에 남아 기계들과 싸워야 한다. 당신은 어떤 알약을 선택하겠는가.
▶혜선=원래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게 목표였다. 지금은 남들보다 조금은 더 나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만큼 많이 공부했고 자신에 대한 투자도 많이 했으니 당연하다. 언제든 기회가 된다면 모험이 될 수 있는 일을 택하겠다.

▶두훈=영화 속 주인공이라면 당연 파란약을 선택하겠지만 현실에선 그럴 수 없다. 취업이 당면 목표고 꿈이다. 누가 내 손 안에 빨간약을 쥐어 주기만 해도 고맙겠다.

▶혜림=졸업 후 부모님 소개로 안정된 일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일을 하고 싶어 창업을 했다. 처음에는 주위에서 배부른 소릴 한다며 욕도 많이 먹고 혼도 났지만 지금은 잘한 것 같다. 시에서 창업자금까지 지원받아 정식으로 회사를 설립하고 나니 부모님도 응원해 주신다.

▶선미=망설임 없이 빨간약을 선택할 것이다.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평범한 삶 속에서 가정을 일구고 행복하게 사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희경=어른들은 젊으니까 뭐든 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 사회에서 젊다고 뭐든 맘먹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꿈을 꾸는 것도 어느 정도 현실에 기반을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아는 이성적인 친구라면 누구도 선뜻 파란약을 선택하지 못할 것이다.

▲ 기호일보 창간 26주년을 맞아 26살 청춘들이 희망을 이야기 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의류쇼핑몰 디자이너 곽혜선, 의류쇼핑몰 CEO 차혜림, 취업준비생 김두훈, 결혼을 앞둔 이선미,직장인 당희경(사진 왼쪽부터)씨가 인천시 중구 콘서트하우스 현에서 '26 희망을 이야기하다'를 주제로 토크콘서트를 하고 있다./최민규 기자 cmg@kihoilbo.co.kr

-‘유신세대’, ‘386세대’, ‘X세대’, 그리고 ‘88만 원 세대’. 시대별로 20대를 특징짓는 언어가 있었다. 그리고 세대를 구분 짓는 기준점에는 항상 민주와 반민주, 자본과 반자본 등 경계가 있었다. 지금 당신들의 경계는 무엇인가.
▶선미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아닐까 싶다. 늘 그랬듯이 학교 다닐 때는 어느 학교를 다니느냐가 능력의 잣대가 되고, 지금은 어느 직장에 근무하고 무슨 직업을 가졌느냐가 나의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기준이 된다.

▶혜선=특별히 어떤 경계가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20대는 그저 과도기일 뿐이다. 앞으로 어떤 위치에 설지 모르는데 내가 어느 경계에 서 있고, 굳이 어떤 편이냐고 나누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본다. 지금의 나는 나를 더 완성해 가는 준비 과정에 있다.

두훈=정회진 기자는 대학 동기이면서 오랜 친구다. 지금은 지방지 기자지만 여자라서 그래도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도 더 나은 직장을 다니기 위해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나의 경계는 직장인과 취업준비생, 그리고 대기업과 중소기업만이 경계로 느껴진다.

혜림=처음 부모님께 창업을 하겠다고 할 때 반대가 컸다. 아버님은 늘 남들처럼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할 수 없느냐고 하셨지만 지금은 취업문을 뚫고 들어가는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게 돼 버렸다. 그렇다고 ‘대각선’이란 회사명처럼 선을 긋고 싶은 생각은 없다.

▶희경=‘88만 원 세대’란 말을 솔직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쩜 이를 뼈저리게 느끼는 자와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한 불만에서 오는 괴리감, 또는 지나친 기대심리에서 오는 자괴감이 스스로를 갈등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의 기성세대 중 상당수는 20대가 너무 게으르고 부모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커 미래가 밝지 못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보는 기성세대, 즉 부모님 세대는 어떻다고 보는가.
▶두훈=살아온 배경이 다르지 않은가. 게으르고 자립심도 없다는 것은 현실 많은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몰라서 하는 얘기인 것 같다. 사실 기성세대들에 대한 불만도 많다. 세월호 참사처럼 아직 우리 사회는 원칙과 기본을 무시하는 기성세대들 때문에 많은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지 않는가.
▶혜림=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경제성장을 가져온 데는 그만큼 기성세대들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랬는데, 너희는 왜 못하니”식의 영웅담을 들으며 그들의 비유를 맞추고 싶진 않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어른들을 볼 때 언제까지 과거의 환상에 사로잡혀 살지 걱정되기도 한다. 지금은 나의 영웅담을 만들기에도 급급하다.

▶선미=10대 땐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했다. 마치 로봇처럼 부모님이 정해 준 시간에 맞춰 학원에 갖고, 부모님 취향에 맞춰 사 주는 옷만 입었다. 그런데 20대가 됐다고 갑자기 독립하라는 것은 너무하다는 생각이다.

▶희경=부모님 세대는 아무래도 살아온 나이 탓인지 이미 자기 자신이 길들어져 있는 틀에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문제는 그 틀을 자식들에게도 너무 강요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세대 간 갈등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찾았으면 한다.

▶혜선=주변의 친구들을 보면 거의 대대수가 대학을 나왔다. 비슷한 학력에 어느 정도 자격증과 토익 등 ‘스펙’도 비슷하다. 요즘 젊은이들의 어떤 면을 보고 게으르고 독립심이 없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부모님 세대보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더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 살고 있다는 거다.

-일정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로 사는 ‘프리터족’과 ‘니트족’(일할 의지도 없는 청년 무직자)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한편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기를 원하는 싱글족도 늘고 있는 추세다. 당신들의 10년 후 모습은 어떠한가.
▶혜림=지금은 결혼할 생각이 없다. 그래도 10년 후에는 자식이 있고 가정이 있었으면 한다. 10년 후 성공한 CEO도 좋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각선이란 회사명처럼 역동적인 삶을 살고 싶다.

▶두훈=10년 후 평범한 직장인이 돼 있을 것이다. 한 가정을 이루고 매일매일 뻔한 일과에 시달리면서도 주말이면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캠핑을 갈 것이다. 그렇게 평범한 가정을 일구는 게 지금의 꿈이다.

▶희경=니트족과 싱글족, 모두 사회에 적응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10년 후든 1년 후든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꿈꾸던 그 무언가에 다가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혜선=10년 전, 26살이 되면 높은 구두를 신고 전문인으로 대우받는 멋진 직업인이 되는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앞으로 10년 후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당당히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선미=공무원이 될 것이다. 무슨 대단한 국가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안정된 직장에서 자식을 키우고 한 남편의 아내로서 사랑받고 살고 싶다.

2시간 넘게 진행된 이들 ‘88둥이’와의 인터뷰는 인근 주막으로까지 이어져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계속됐다. 모두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분명한 건 아직 이들은 저마다 꿈을 꾸고 있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처음 태어났을 때처럼 우리는 그들이 꾸는 꿈을 ‘희망’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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