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에서 운용됐던 ‘암행어사(暗行御史)제도’가 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어사 박문수’라든가, 소설 속이지만 ‘춘향전’의 이몽룡 등은 불의(不義)를 타파하고 ‘정의(正義)’를 세우는 어사로서의 직분을 다해 백성들에게서 추앙을 받았다.

영화로도 제작·상영되기도 했지만 춘향전에서 어사출두에 앞서 지어낸 이몽룡의 시 구절은 언제 봐도 우리를 통쾌하게 한다.

주지하고 있는 문장이지만 한 번 더 인용해 본다. “금술잔의 향기로운 술은 백성의 피요, 옥쟁반의 맛있는 고기안주는 백성의 기름이라. 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피눈물이 떨어지고, 노랫가락 높은 곳에 백성의 원망소리 드높구나. -금준미주(金樽美酒) 천인혈(千人血), 옥반가효(玉盤佳肴) 만성고(萬姓膏). 촉루락시(燭淚落時) 민루락(民淚落), 가성고처(歌聲高處) 원성고(怨聲高)”

탐관오리들로서는 가슴 뜨끔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좋은 제도도 어사들이 가렴주구와 부정을 일삼는 지방 수령들에게서 뇌물을 받고 눈감아 주는 등 부패로 전락, 종국에는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 며칠 사이에 감사원 감사관들이 억대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는 사건 보도가 잇따르자 시민들의 어안이 벙벙하다. 공직기강을 바로잡아야 할 감사원이 뇌물을 받는 기관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감사원이 어느 기관인가. 꽤나 오래전의 일이다. 필자가 한 번은 이회창 감사원장의 초청으로 서울 삼청동 감사원에서 오찬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방문 기념품이라 해 오마패가 새겨진 넥타이핀을 선물받았다. 암행어사의 상징인 마패 문양의 디자인 내력을 물었다. 감사원의 정신이, 업무가 그 옛날의 암행어사 제도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라 이를 나타내기 위해서라했다.

이해가 갔다. 좋은 아이디어라고 말해 줬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감사원 홈페이지를 열면 감사원의 원훈인 ‘바른감사 바른나라입니다’라는 문구가 떠 있다. 그렇다. 감사원은 이처럼 공직기관에 대한 바른 감사를 통해 부조리를 척결, 바른 나라를 세우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는 헌법상 최고의 감사기관이다. 하지만 이제는 ‘감사하는 자를 감사할 자 그 누구냐?’라는 물음을 가능케 하고 있는 퇴락한 감사원이 됐다.

요즘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한 재력가의 사후 장부에서 현직 검사의 금품수수 내역이 적혀 있어 검찰이 수사 중이라 한다. 점입가경이다. 장부에 적혀 있는 한 검사의 뇌물 수수액이 처음에는 200만 원이었다가 300만 원으로, 다시 천만 원대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검찰을 시민들이 어찌 일국의 수사기관이라 믿을 수 있겠는가. 금전 출납 사항을 적어 놓은 하나의 장부가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검사 외에도 지방의원, 경찰, 세무공무원 등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는 점이다.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한 또 하나의 근자 사례로는 군(軍) 간부와 가족들이 전투병력과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 것을 주 임무로 하는 군(軍)수송기를 이용, 마치 전세기처럼 사용해 수년간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곤 했다는 어이없는 소식이다.

 감사 결과 적발되긴 했지만 20년 동안이나 적발하지 못한 감사기관의 책임이 크다. 게다가 더욱 가관인 것은 지난 7일, 한 해군호위함장이 회식 중 여군 장교를 성추행해 3일 후에 보직 해임되기까지 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북한이 동해상에 미사일을 쏘아 올리는 등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시기가 아닌가. 군인정신이 없는 이들에게서 무슨 정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정의란 사전적 풀이에 따르면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이다. 무엇이 정의인지 모르는 부류의 공직자들이 너무 많다.

부정부패는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이 사회를 병들게 한다.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 사회 도처에서 부패한 공직자들에 의한 금품 갈취 행위와 온갖 비행이 자행되고 있다.

‘법의 이념’은 ‘정의(正義)’다. 정의가 없는 권력은 차라리 폭력집단이다. 철학자이자 신학자이기도 했던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는 “정의가 없다면 권력이란 강도에 불과하지 않은가?(In the absence of justice, what is sovereignty but organized robbery?)”라고까지 표현했다.

위법과 탈법을 여반장으로 여기고 공사(公私)조차 구분 못하는 함량 미달의 공직자들이 잔존하는 한 이 땅에 정의 구현은 요원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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