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학물질 누출사고가 일어난 인천시 서구 왕길동 H화학공사 인근의 밭작물과 나무, 묘역 잔디가 누렇게 말라 있다. /이창호 기자 ych23@kihoilbo.co.kr

“동네에 이렇게 위험한 화학물질 저장탱크가 있었는지 우린 전혀 몰랐지. 만약 탱크가 폭발하기라도 하면 어찌 될지 불안해 살 수가 없어.”

최근 인화성 화학물질인 아세트산비닐 수백L가 누출되는 사고를 겪은 인천시 서구 왕길동 주민 유희상(42)씨는 조상을 모시고 수십 년 살아온 터전을 떠나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에 하루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이 지역 봉사단체(라이온스클럽) 회장을 겸하고 있는 유 씨는 지난 19일 동네에 화학물질이 유출됐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에서만 20년 넘게 살아왔지만 이처럼 위험한 화학물질 저장탱크가 있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고가 난 H화학공사의 저장탱크는 지하에 매설돼 있고, 회사 정문에는 ‘○○물류센터’로만 회사명이 표기돼 있어 이곳이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곳인지 주민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사고 발생 10여 일이 흐른 30일, 주변 현장은 벌써 아름드리 소나무가 늦가을 단풍처럼 갈색을 띠며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가을걷이가 한창이어야 할 고추와 깻잎 등도 바싹 말라 더 이상 수확을 기대할 수 없었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단정하게 벌초를 끝낸 묘역의 잔디도 이미 누렇게 변색이 된 상태다.

사고 당시 화학물질이 흘러 들어간 하천에는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고, 저장탱크 주변 농가에서 키우던 개와 닭이 폐사했다.

일부 주민들은 심한 두통과 구역질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지만 관계 당국은 유출된 아세트산비닐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그로 인한 인체 유해성은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주민들에게 알려 주지 않고 있다.

사고를 낸 H화학 측은 현재 500여L의 아세트산비닐이 유출된 것으로 밝히고 있지만 목격자와 주민들은 이보다 많은 양이 누출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사고 현장을 직접 목격한 유 씨는 “화학물질이 누출되고 2시간 후께 주민 신고로 소방차가 출동했지만, 이후에도 2시간이 더 지나서야 중화제가 투입됐다”며 미숙한 초동 조치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세 살배기 아이를 키우는 주부 유선영(30)씨는 “화학약품 냄새가 아직도 진동하는데 관할 구청과 소방서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서로 책임만 떠넘기는 것 같다”며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하루하루가 불안하기만 하다”고 했다.

이어 “지금도 창문을 열면 아세트산비닐의 톡 쏘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국제암연구소(IARC)는 필름, 접착제, 목공용 본드, 껌 등의 원료로 이용되는 아세트산비닐을 2B 등급의 발암물질로 분류하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관할 구청인 서구청과 소방당국은 화학물질 누출로 인한 주변 환경과 주민들의 건강 피해가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역학조사는 뒷전인 채 해당 기업에만 전적으로 사고 책임을 떠안기고 있어 주민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한편, 화학물질 저장탱크에서 300~400m 떨어진 곳에는 1만4천여 명이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도 위치해 있다. 또 반경 2㎞ 당하동과 마전동 주민까지 합치면 10만여 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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