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한완상 교수님의 강연을 들었다. 두 번의 부총리를 겸하면서 18대 통일원 장관과 제1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역임하신 터라 시간 여유가 되실까 걱정했는데 흔쾌히 인천까지 와 주셨다. 기대했던 만큼 강연이 좋았다.

1936년에 태어나셨으니 조만간 팔순 연세가 되신다. 80살이 가까운 세월을 사시는 동안 세상을 따뜻함으로 품어줄 수 있는 가슴이 되기까지 많은 갈등과 번뇌의 세월을 거치면서 완숙의 격을 만들어 오셨겠구나 생각했다.

강연의 주제가 ‘발악(發惡) 아닌 발선(發善)합시다’였다. 발악을 하면 악마의 힘을 키워 주는 에너지가 되고, 발선을 하면 악마의 힘을 빼 주는 에너지가 돼 세상도 사람도 원숙하게 익어간다 하셨다. 발선을 세상의 이치로 보자면 사랑이고 배려이며 상대방과 나에 대한 존중이라는 말에 공감했다.

발악의 사전적 의미는 앞뒤를 분별해 따지지 않고 모질게 기를 쓰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악에 받쳐 극으로 치닫다 보면 감정이 격해져 현명한 결과를 유도해내기가 어려워진다. 빨리빨리 내 욕구가 만족돼야 하는 사람들은 기다리지 못한다. 종교,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계층 간의 갈등에도 내 주장만 중요해 기를 쓰고 퍼붓는다.

댓글을 선하게 달자는 선플 운동도 같은 맥락의 발선이다. 무자비한 악성 댓글로 상처 입은 사람들이 극단의 선택으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독한 악플로 상처받는 일이 없어지면 세상은 한결 살만해질 것이다.

발악의 예로 들려주는 상황들은 정치, 경제, 종교의 대립도 있고 나를 중심으로 한 삼라만상과의 관계 정립과 대립 상황도 있다. 강연을 듣는 청중이 많지 않은 장소라 눈을 마주하며 듣고 있으니 가슴이 뭉클했다.

강연이 끝나고 교수님은 댁으로 가는 전철역으로 가시고 우리는 강연의 감동이 벅차 자리를 뜨지 못했다. 다시 커피잔을 들고 둘러앉았다. 다들 한마디씩 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니 부끄럽고 민망해 저절로 반성이 되더라는 말을 이구동성으로 한다. 교수님이 나를 꼭 집어 하시는 말 같아 부끄러웠다는 고백이다.

거국적인 일은 제쳐두고라도 나와 가족 간의 문제만이라도 먼저 발선하자, 의견을 모았다. 50대가 되니 힘 없어진 남편도 불쌍히 봐주고, 시집살이 주적인 시어머니와 시누이도 먼저 안아주고, 성에 안 차 닦달했던 애들도 기죽이지 말고, 꼭 잘난 친구하고만 비교해 주눅 들었던 자신에게도 칭찬해 주고. 그러면 날마다 은총이겠다며 다들 기분 좋게 웃었다.

그 다음에 사회로 눈 돌리자. 아줌마의 능력은 무궁무진이라 힘을 합치면 엄청난 파급효과를 낼 수 있다. 다들 부흥회에서 왕창 은총을 받은 분위기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장석주 시인의 시 ‘대추 한 알’이 떠올랐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고 저게 저 혼자서 둥글어 질리는 없다’는 시인의 말 속에는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과의 조화와 배려를 보여 준다. 그래서 ‘대추나무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로 마무리한다.

바른 처신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을 갖고 바른 생을 사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우리는 붉어지고 둥글어져 갈 것이고, 당도 높은 과육을 키우기 위해 발선하며 살아가려고 애를 쓸 것이다.

귀갓길 발걸음부터 발선하자에 기운 빼지 말고 바로 격려를 주고받았다. 마음이 따뜻하고 뿌듯해져 세상이 푸근하게 다가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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