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코끝 찡한 냉기가 스며든다. 시린 바람에 어깨가 움츠러들고 발걸음도 분주해진다. 한 해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채우지 못한 성과에 조바심이 나고 짧아진 해만큼 남은 시간도 달랑달랑이라 마음이 바빠진다.

생각해 보면 정초부터 분주했고 열심이었지 마냥 게으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맘때가 되면 아쉬워 자책을 하게 된다.

대단한 업적으로 마무리가 됐더라면 한 해를 잘 살았구나 만족할 텐데, 별로 건진 것 없어 보여 허투루 보낸 것 같아 미안해진다. 하루가 깊어지고 마음도 깊어지는 긴 겨울밤에 밤 깊도록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심란하다가 문득 나를 위로하고 싶어졌다.

나이 들수록 세월은 더 빠르고 별반 다르지 않은 하루하루가 쏜살같아 벌써 마지막 달이다. 그래도 찬찬히 돌아보니 뉴스에 나오는 끔찍한 일도 겪지 않았고 건강한 식욕으로 맛있게 먹었고 송년모임 예약이 여럿이니 지인들과 어울려 즐거운 칸타타 12월이 될 것 같다. 이만하면 올 한 해도 잘 살았구나 싶다.

유난히 올 한 해는 나라 안팎에서 사건·사고가 많았다. 슬픔이 오래 지속되니 가슴에 분노가 차오르고 어처구니없는 사고는 연달아 일어나고 재난 대처 방식은 미숙하고. 뉴스 보기가 겁이 났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 우울해 무기력해지는 것 같았다. 가까운 지인 중에도 간까지 전이된 췌장암 말기 선고를 받은 친구의 남편을 시작으로 친척 중엔 사십 살의 젊은 가장이 돌연사하고 갈등으로 돌도 되지 않은 애기를 두고 가출한 뉘 집 며느리까지 가까운 친구와 친척과 이웃의 아픔이 불편해서 불면증이 왔다.

어느 날부터 비극으로 끝나는 소설도 영화도 보기가 싫어지고 끔찍하거나 너무 슬픈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마음도 몸도 올가미에 걸려서 허둥거려 힘이 들었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평온을 찾는 듯 보였고 휘저어진 흙탕물도 가라앉으면서 맑아지고 있는 것 같다.

이따금 눈도 흘기고 퉁퉁 불평하면서 보낸 시간이 계면쩍다. 소소한 결핍을 부풀려 떼쓰는 아이처럼 어리광을 피운 게 아니었을까. 이리 생각하는 마음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장거리 여행에 고민 없이 떠날 수 있게 해 준 가족이 있고, 울 엄마에게 추천하는 영화라며 기꺼이 두 번 영화를 봐 주는 아들이 있고, 어떤 얘기든 대화가 되는 ‘울 엄마가 완전 쵝오!’ SNS 신조어로 거리감 없이 들이대는 딸이 있고, 아직 두 분 부모님이 계시고 송구하지만 작가로 예우해 주는 주변 분들이 있고, 드러내기 민망하지만 내 작은 마음 나눔으로 따뜻함을 전할 수 있는 후원도 기부도 멘토 역할도 할 수 있어서 다 고맙다.

마음을 가다듬는 한 해의 끄트머리 달 12월, 본격적으로 추위가 시작되고 대설이 있어서 눈길이 미끄럽고 동짓날 긴긴밤으로 해가 일찍 진다. 얼음 조각과 칼바람이 날카로워도 메말라 바스락거리는 마음만 아니면 기대고 안아주고 온기를 나누며 위로를 주고 위로를 받고 싶어진다.

마음을 담은 정성으로 한 해 나에게 따뜻함을 준 분들에게 감사편지를 쓰고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해야겠다. 함께 따뜻한 차를 마시고 보글보글 끓는 찌개로 식사를 하고, 시간이 더 된다면 뜨뜻한 온천욕을 하면서 나긋나긋한 수다로 긴장을 풀고 싶다.

분주하게 부지런하게 일군 봄 있고 여름 있고 가을 지나왔기에 맹추위 한겨울을 휴식하며 잠잠히 마음을 데우는 온기로 쉴 수 있는 것이겠지. 이만하면 잘 살았다. 나도 당신도 세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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