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미국이 흑인 피살사건에 휩싸여 전국적인 소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첫 번째 사건은 지난 8월에 있었던 미주리 주 퍼거슨시에서 발생한 비무장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18)의 죽음이다.

두 번째 사건은 7월에 있었던 뉴욕시 스태튼아일랜드에서 있었던 비무장 흑인 에릭 가너(43)의 죽음이다.

세 번째 사건은 12월 5일 애리조나에서 발생한 비무장 30대 흑인 루메인 브리즈본(34)의 죽음이다.

이 세 죽임은 공권력이라는 무장경찰의 무모한 총격행위에 희생을 당한 흑인들이다.

그런데 이들을 죽인 백인 경찰은 대배심에서 총기 사용은 정당한 공무 집행이라는 판결을 받고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는 데 문제의 불씨가 남은 것이다.

민주주의의 본산인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시위대들은 점점 불어나는 추세이고, 4천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뉴욕 중심가 곳곳에서 죽은 듯 땅바닥에 드러눕는 ‘다이인’(die in) 시위를 벌이거나 경찰의 폭력으로 희생된 흑인 피해자들의 이름이 쓰인 관을 들고 항의행진을 벌였다.

 시위는 평화롭지만 워싱턴DC, 시카고, 보스턴, 피츠버그, 볼티모어 등 다른 동부지역으로 무섭게 확산되고 있다. 알 샤프턴 목사를 비롯한 흑인 인권운동가 20여 명은 오는 13일 워싱턴DC에서 ‘경찰 폭력에 항의하는 국민행진’을 벌이겠다고 밝혀 퍼거슨 사태에 이어 대규모 흑백 갈등으로 비화할 조짐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이 경찰을 재교육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민심 달래기에 나섰다. 4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시위 확산과 관련해 “이 나라의 누군가가 법에 따라 공정하게 대접받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문제이며, 이를 해결하는 건 대통령으로서의 내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벌어지는 흑인 피살 사태에 따른 폭동 수준의 사회적 불만이 이렇게 심각하게 확산돼도 누구 하나 책임지고 사과하는 사람이 없다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대통령조차도 법대로 한 것이니 법을 지키라는 식의 ‘법대로만’ 외치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문제는 국가사회의 지도자나 책임자가 사과를 하지 않는 데서 시민의 분노가 폭발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면 지난 8월 3일 여당 정치인이 4월 발생한 육군 28사단 윤모 일병의 선임병들에 의한 집단폭행 사망사건에 대해 “분명 살인사건”이라고 규정하고 군 당국을 강하게 책임 추궁했던 일이 있었다. 윤 일병 사망사건의 극악함에 해당 장관의 책임을 묻다가 책상을 치면서 국민적 공분을 군 당국에 전달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후 원인 제공은 제쳐두고 책상을 쳤다는 꼬투리를 잡아서 사과를 요구하는 분위기로 진행돼 왔다고 한다.

심지어 고려시대 경인년 무신난을 일으키게 된 배경사건이었던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사건에 비유하며, 국회의원이 군의 수장을 혼낼 수 있느냐는 식의 논리를 전개하며 대군(對軍)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1월 14일 정식으로 언론을 통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사과를 하면서 마무리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과(謝過)는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비는 행위이므로 누구든지 잘못이 있다면 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사과를 요구하는 측은 사과를 받을 만한 정의로움에 서 있어야 하지 않을까? 군을 지휘하고 관리하고 운영하는 분들은 과연 윤 일병 사건과 임 병장 사건과 같은 천인공노할 악행이 발생한 군을 책임졌던 분들로서 과연 사과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

그 이후에도 군은 장군과 장교들의 연이은 성추문으로 국민에게 큰 실망을 줬다. 국민의 심정에서 군에 대해 책상을 몇 번 더 칠 수 있는 일은 아닐까?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 여당 정치인의 사과를 기다렸듯이 국민은 군의 사과를 기다린다는 생각을 해 보면 어떨까 한다.

맞는다면 누군가는 올해가 가기 전에 군을 대표해 국민의 상처받은 가슴에 사과를 하는 것이 군답다고 사료된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용서를 빕니다”는 비겁한 변명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치유의 한마디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미국의 흑인 피살사건도 법대로만 강조하지 말고 누군가 당당하게 국민 앞에, 흑인사회에 사과하는 용기를 발휘할 때 자제와 평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과할 수 있고, 사과를 받아주고, 다시 사과하는 멋진 정치인이 있는 한 우리 사회는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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