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사자성어로 지록위마(指鹿爲馬)가 선정됐다. 올 한 해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사회를 아우르는 성격을 밝혀 의미를 규정한 것일 텐데 적절하다는 평이 많다. 알다시피 ‘지록위마’는 진나라 시황제가 죽고 난 후, 환관 조고가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면서 자기 편을 가려내기 위해 쓴 술책에서 나온 말이다.

고사성어 내막은 이랬다. 조고가 사슴을 허수아비 어린 황제에게 바치면서 “아주 좋은 말입니다”라고 했다. 당연히 황제는 조고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사슴을 말이라 하는가?” 물었고, 조고는 대신들에게 “이 동물이 사슴이요? 말이요?”라고 하자 대다수 대신들은 조고가 두려워 말이라고 대답했다.

사슴이라며 바른 말을 한 몇 명의 충신은 예상대로 죽임을 당했다.

조고의 권력에 놀아난 진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 국세가 어지러워지고, 조고는 자기가 새로 옹립한 황제에게 되레 주살을 당한다. 결국 한나라 시조 유방이 천하통일을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줘 진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가장 최근의 ‘땅콩 회항’ 사건을 비롯해 몇몇의 떠들썩한 사건들이 진실을 감추려고 한 데서 일이 일파만파로 커졌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게 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집단으로 우울해진다.

좀 위쪽 고위층에 있는 분들, 좀 힘을 가졌다 생각하는 분들, 좀 재력이 있다 하는 분들이 세상을 만만히 여겨 내려다만 보지 말고 배려와 존중으로 올려다 볼 줄 아는 지혜를 가졌다면 이런 사단은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내 오랜 지인의 가족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개 같이 벌어서 시댁 식구들에게 다 뜯기고 개털됐다”며 격앙된 어조로 울분을 토해내는 지인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오빠 동거녀에게 방을 내주고 시세 몇 배의 방값을 오빠에게 받아 챙긴 시누이, 빈털터리로 시골 내려와 선산 지킴이를 자청해 종가 재산과 거액의 관리비를 챙기는 아주버님, 뭉칫돈 찔러주는 아들 앞잡이로 너만 참으면 만사가 편하다고 이미 저세상 가신 친정 부모 가정교육까지 운운하며 며느리 잡는 시어머니, 반항기 가득한 아들딸에게 돈으로 보상하는 남편, 돈줄이 남편임을 알아 지인을 무시하고 지들끼리만 속닥속닥. 바른 말 하는 내 지인만 쫓아내면 자기들 세상이라고 온갖 거짓말과 술수로 지인을 괴롭혔다.

우직한 내 지인은 ‘말이 아니고 사슴이다’라고 호소를 해도 남편은 들은 척 만 척.

돈줄인 남편에게 사탕발림 아부 일색인 시댁과 자식과 주변 사람들에게 지쳐서 지인은 우울증에 자존감 붕괴에 생을 놓을 결심까지 하다가 결국 바닷가 오막살이집에 정착했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바닷물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자니 유행가 가사가 꼭 내 말이더라.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바보처럼….’ 울먹이는 말 속에 다사다난의 세월이 보여서 마음이 무거웠다.

다행인 게 이혼 대가로 명의이전받은 낡은 건물을 부동산개발업자의 조언대로 리모델링해서 꽤 큰 액수를 챙겼다. 노후 준비가 완료되고 자갈밭 매야 하는 마음고생이 사라지고 수발할 식구도 공장 직원도 없으니 몸이 자유롭고, 명절이고 부모님 생신이고 먼 나라 이야기인지라 가 본 적 없는 친정이지만 이제는 수시로 부모님 산소에 가서 이런저런 넋두리도 수다도 풀어 놓으면 대답은 없지만 묵묵히 들어주는 부모님이 계신 곳이라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다.

딸 결혼식장 혼주 자리에도 밀려났는데 딸이 아이를 출산하고 엄마를 찾아왔다고 한다. 딸이 낳은 손녀를 보며 “너도 네 딸도 이 엄마처럼만 살지 말거라. 타산지석이 된다면 엄마 인생이 영 실패도 추레하지만도 않을 것이다”했더니 딸이 용서를 빌더라고 한다.

엄마 떠난 집안은 부실시공인 건물처럼 온데 만데 부서져 내리고 네 탓, 내 탓 고성에 서로의 마음을 할퀴고 그 많았던 재산은 어느 순간 눈 녹듯 없어지고 생지옥이 됐다며 엄마 내쫓은 벌 받았나 보다고 서럽게 울더라고 한다.

견고한 성처럼 단단하게 뭉쳐 남편을 왕좌에 올리고 재물을 탐하던 시댁 식구들은 돈줄이 막히자 남편에게도 자기들끼리도 악다구니로 물고 뜯는 생지옥이 됐다 한다.

우직한 내 지인은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왜 이리 명치 끝이 탁 막혀 답답한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쉰다.

봄 되면 작은 집 지어서 내 식구만이라도 데려와야겠어. 그래, 계산상으로는 밑져도 한참 밑지는 거래지만 그게 남는 장사 같다.

 봄이 오면 조고 같은 환관들에게 휘둘려 헛짓으로 아내도 가정도 재산도 못 지킨 지인의 남편이 새 사람으로 환생해서 거짓됨에서 벗어나 세상을 밝게 보며 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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