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는 분이 꽃게를 사러 경인지역에서 꽤나 유명한 포구에 들렀단다. 주말이어서인지 포구는 발 디딜 틈 없이 방문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단다.

택시기사나 대리기사에게 으레 그래왔듯 그는 꽃게 장수에게도 한마디 건넸단다. “좀 어떠셔?”라고.

한데 돌아온 대답에 그는 기가 막히고 말았다. 방문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는데다 연신 흥정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데도 “이러다 다 죽게 생겼수”라니.

 우는 소리 하는 게 장사치들의 속성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곱씹을수록 배알이 꼴렸다. “예끼 여보슈! 정작 죽게 생긴 사람들은 군소리도 안 하는데 무슨 엄살이 그리 심하오?”

언제부턴가 그랬다. 이런저런 외부 요인과 내부의 문제로 삶의 무게에 짓눌린 탓인지 우리는 입만 열면 한숨부터 쉬고 죽는 소리부터 뱉어내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사는 게 왜 이리 무미건조하냐”고 푸념하고, “갈수록 왜 이리 힘드냐”고 뭔가를 원망하고 있었다. 갓난애는 울어야 젖을 준다지만 적어도 성인은 우는 소릴 하면 주변에서 부담스러워하기 마련인데도 말이다.

을미년 새해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새해에는 제발 울지 좀 말자. 한숨은 환호로, 우는 소리는 탄성으로 바꾸자. 누군가가 ‘좀 어떠셔?’라고 묻는다면 그게 상투적인 물음이건 진심 어린 질문이건 이렇게 답하자. 정말 살맛 난다고. 아무리 죽을 지경이라도 말이다. 이게 바로 긍정의 힘이 아니겠는가.

누군가가 그랬다. 인생에는 분실물센터가 없다고. 한 번 흘러가 버리면 끝인 지금 이 순간 속에서 희망을 뽑아올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람’을 끌어모으는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유심히 관찰해 보자. “그곳을 빠져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곳을 거쳐 가는 것이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말처럼 지금은 긍정의 언어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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