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을 비교해 봤더니 달팽이는 0.0004㎞, 보통 사람은 4㎞, 달리기 세계기록 보유자는 37.4㎞라고 한다. 사람의 평균 보행속도로 보면 1시간에 10리를 간다는 계산이다.

이 정도면 세상 풍광을 눈으로 담을 만한 속도는 되는 셈이다. 요즘 세상에서 걷는 속도로 세상을 사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느림은 게으름과 동의어라 비난받을 각오를 해야 하고, 세상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낙오자가 되기 십상이다.

현대인에게 속도는 분명 매력적이다. 효율성 면에서 속도는 무시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행여라도 바투 잡아챈 손아귀에서 빠져나갈까봐 다급하고 예민해져 동동거리게 된다.

 세상사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밝음이 있으면 어둠도 존재한다. 빠름의 성과 뒤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도사리고 있어서 세상을 인정머리 없게 만드는 위해 요소가 되곤 한다. 간편하고 빠른 세상은 사람들을 악 쓰게 만들어 결국은 서로를 진 빠지게 만든다.

생존의 양식이 절박했던 시대는 전설이 된 지 오래됐는데도 결핍에 대한 체감온도는 더 낮아지고 있다. 더 빨리 더 많이 누리고 싶은 항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양껏 채워야 만족할 그릇은 바닥이 보이니 괴롭다.

치열함이 미덕인 시대가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여유와 휴식을 누리지 못해 피로감이 쌓여 갔고 마음도 피폐해져 세상 정서는 야금야금 사막화되고 있다.

빨리빨리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느림을 예찬하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현재의 삶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피안의 세상을 동경하는 마음으로 해 본 말들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을 만나면 대단하단 생각이 들고 용기가 부러워 질투도 난다.

 거주를 옮기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이루고 쌓았던 현재의 누각을 거침없이 던질 용기가 나지 않는 대다수 사람들은 힐링이란 이름으로 색다른 여행을 시작했다.

걷기여행이다. 걷기 위해 시간을 내고 돈을 쓰고 힘들게 땀을 흘리는 것이다.

천천히 느리게 걷는 동안 빠르게 지나치면서 보지 못한 세상과 자신을 들여다보며 위로받고 평안을 얻는다.

처음으로 도보여행 코스인 ‘제주도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이사장이 한 말이 생각난다. 2006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허겁지겁 살아온 세월을 내려놓고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치유하고 돌아온 서 이사장은 풍광 수려하고 아름다운 고향 제주도에 꼭 힐링 도보여행길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제주 올레길은 2007년 9월을 첫 시작으로 도보여행이라는 새로운 여행 방법을 선보였다.

 8년이 지나면서 5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사람들이 비행기로 배로 바다를 건너 올레길을 걸으며 치유여행을 다녀갔다. 처음 시작할 때는 누가 돈 내고 와서 힘들게 걷는 여행을 할까? 과연 몇 명이나 찾아올까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달팽이가 보는 시야는 제쳐두고라도 사람이 걸으면서 보는 시야와 달리면서 보는 시야의 폭과 넓이는 크게 차이가 날 게 뻔하다. 느림이 미학이 돼 휴식을 위해 사람들은 걷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유행처럼 어디 이름난 그곳에 가야만 한다는 또 다른 강박이다.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된 ‘슬로길’로 유명한 청산도를 가려면 서해안고속도로 끝까지 내쳐 달리고 다시 목포에서 강진을 거쳐 해남을 지나 완도여객터미널에서 훼리호를 타고 청산도로 들어가야 한다.

배는 붕붕 나는 속도로 청산항에 도착해 울긋불긋한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무더기로 쏟아낸다.

인구 5만 명 이하의 인구가 전통적 수공업으로 물건을 만들고 전통조리법을 보존하고 있으면서 고유의 문화유산이 지켜지고 있고 자연친화적인 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곳이라야 하는 ‘슬로시티’ 지정 요건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청산도였지만 고즈넉하고 느린 시간이 예전 같지 않다.

해안선 길이 42㎞는 마라톤 길이와 비슷한 길인데 뛰어서 기진한 상태로 골인하는 마라톤으로는 느림의 미학을 체험할 수 없다.

느림의 여행, 달팽이 여행까지 남들에게 뒤질세라 발도장을 찍지 못하면 낙오자가 된 것 같아 조바심으로 찾는 여행말고, 치유의 시간 휴식의 시간으로 여유로운 발걸음 가볍게 도란도란 편하고 정다운 도보길 여행을 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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