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구 청운대학교 교수

3월이 시작되면 대학가는 분주하다. 새내기들이 졸업생들의 빈자리를 채우면서 자신의 미래를 발견해 보려는 비상의 날갯짓 때문이다. 누군가는 요란한 음악이 울리는 그룹사운드 동아리 주변을, 어떤 학생은 토익 책을 옆구리에 끼고 외국어 강좌를, 지적 열망이 강한 학구파는 도서관 미로 속을, 때로는 호프집을 두리번거리기도 할 것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첫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이때쯤이면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새내기들에게, 또는 내 멘티들에게 좋은 책을 읽으라고 때때로 겁박(劫迫)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는 협애한 논리는 세 가지다.

첫째, 좋은 책과의 만남을 통해 지금까지 익숙했던 일상의 언어들과는 다른 출판 언어를 마음껏 받아들여 보라는 이유에서다. 소위 고전이라고 하는 작품들은 인류의 지혜를 세련된 언어로 찬란하게 지어놓은 궁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수사(修辭)가 화려한 궁전에서 마음껏 뛰어놀아 볼 수 있는 것도 젊은 날의 특권이라 할 수 있다.

‘고전(클래식)’이라는 말은 나라가 어려울 때 부자들이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돈을 내어 산 몇 척의 배, 즉 함대(艦隊)를 의미했다. 이 의미가 변형돼 자신이 힘들 때 나를 지켜 줄 수 있는 책을 의미하게 됐다. 동서양의 고전을 읽음으로써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세련된 언어와 지혜를 듬뿍 얻을 수 있다.

둘째, 좋은 문학작품을 읽음으로써 마음에 정서적 기쁨과 위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도 「시학」에서 문학의 정서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카타르시스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지금도 그리스 시대의 훌륭한 비극을 읽으면 우리의 마음에 파동이 일어남을 느낀다.

좋은 문학작품은 이렇게 시간이 흘러도 독자에게 아름다운 정서적 가치를 불러일으킨다. 오스카 와일드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자신은 올바른 책이냐 올바르지 않은 책이냐가 아니라 아름다운 책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같은 소설가도 교훈을 전달하는 소설보다는 미학적 즐거움을 주는 소설을 쓰겠노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학생들에게 좋은 문학작품을 꼭 읽어야 한다고 반쯤 강요하는 이유는 문학의 인식적 가치 때문이다. 좋은 문학작품을 읽고 나면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구나 하는 ‘에티카(윤리학)’가 생겨난다. 철학이나 심리학은 보편적 인간에 대한 집합적 명제를 제시하지만 보통의 젊은이들이 이 명제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반면에 문학은 구체적이고 독특한 인간들의 내면세계를 언어를 통해 핍진성 있게 묘사한다. 남들에게 손가락질받기 쉬운 인물이지만 왜 그런 행동을 했어야만 했는지 그 사람만의 내면세계를 문학은 보여 준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인물들의 표정은 패배자의 모습이 아니라 때로는 숭고하기까지 하다. 「위대한 갯츠비」에서 갯츠비는 몰락했지만 몰락의 선택이 단순한 패배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좋은 문학작품은 올바른 인간-나쁜 인간, 도덕적인 인간-비도덕적인 인간을 섣불리 규정하지 않는다. 선한 인간-사악한 인간이라는 판단을 내리기 전에 인간에 대한 인식을 충분히 하려고 하는 것이 훌륭한 작가들의 공통된 태도이기 때문이다.

좋은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남의 이야기를 애정을 갖고 들어주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괜은 것인가를 스스로 입법하고, 준법하고, 판결을 내리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이다.

프랑스 작가 조르주 페렉의 소설 「인생 사용법」이라는 책의 제목처럼 소설에서 타자의 인생 사용법을 배우기도 하는 것이다.

젊은 시절 독서를 통해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를 고민할 때 노예가 아닌 자신의 진정한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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