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시절 왕복 4시간 가까이 소요되는 통학거리 탓에 1년 넘게 자취생활을 했던 적이 있다. 학교 후문 주변에 방을 얻는 것이 월세도 싸고 다니기 편했겠지만, 졸업논문을 써야 하는 입장에서 산만한 주변 환경이 문제였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곳이 ‘토지금고(인천시 남구 용현5동)’라는 동네였다.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고, 조용한 주택가로 형성돼 학교 다니며 논문을 쓰기에는 적당한 곳이었다.

그런데 불현듯 이곳이 왜 토지금고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금고라 하면 주로 금품을 보관하는 상자나 건물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토지금고는 토지를 보관하는 금고란 말인가?’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 사라진 섬, 낙섬

▲ 1946년 염전이었던 토지금고 자리.

토지금고는 원래 바다였던 지역으로 그 서남쪽 끝에 ‘낙섬’이라는 자그마한 섬이 있었다. 섬의 모양이 잔나비(원숭이)를 닮았다 해서인지 ‘납섬’ 또는 ‘낙섬’이라 부르고 한자로 ‘원도(猿島)’라 썼던 섬이다.

섬의 높이는 해발 27.4m로 그리 높지 않은 편이고 면적은 620㎡로 729㎡의 작약도에 비해 조금 작은 무인도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시대의 지리지에 따르면 이 섬에는 ‘원도사(猿島祠)’라는 이름의 신단이 있어 서해바다 여러 섬들의 신위를 모아놓고 봄·가을로 산(岳), 바다(海), 강(瀆)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수령이 친히 행차해 제사를 주관했다고 한다.

1929년 조선염업주식회사에서 개량 염전을 조성할 때 섬과 육지를 제방으로 연결하면서 육지와 연육됐다.

1960년대 초 송도유원지가 재개장하면서 수도권 최고의 휴양지로 각광받게 되자 인천시에서는 시내에서 송도유원지까지 직선도로를 개설하고자 했다.

당시 시내에서 숭의동과 용현동을 거쳐 조개고개를 넘고 송도역을 지나야 송도유원지에 닿을 수 있었으니 구불구불 돌아가야 하는 길이었고, 도로 사정마저 그다지 좋지 못해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었다.

1969년 인천시는 낙섬에서 옥련동까지 길이 5.1㎞, 폭 20m 규모 왕복 4차선의 송도임해관광도로 건설공사를 착공했다.

 숭의동에서 낙섬까지는 이미 제방이 축조돼있어 별도의 공사가 필요치 않았고, 낙섬에서 옥련동 독바위(瓮巖)까지 제방을 쌓고 도로를 포장하는 공사가 진행됐다.

총 5억1천만 원의 예산을 들여 진행된 임해관광도로 건설공사는 7년간의 공사 끝에 1976년 7월 31일 준공됐고, 시내에서 송도유원지까지 20분 이내에 주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로가 낙섬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것으로 설계돼 공사가 끝난 뒤 낙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됐다.

최근까지 ‘낙섬장’이라는 여관이 있어 이곳이 낙섬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으나 얼마 전 문을 닫아 지금은 길가에 놓인 조그만 표지석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 더 많은 소금을, 더 빨리 만들어라
1907년 최초의 천일염전이 주안에 설치된 후부터 남동염전, 소래염전이 속속 들어서게 되면서 인천은 우리나라 소금 생산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 조선염업주식회사 및 인천염전 전경.1933년 발행된 ‘인천부사’에 수록된 사진.
그 이전의 전통적인 소금 생산방식은 바닷물을 가두고 이를 가마에서 끓여 소금을 생산했던 전오염(자염) 방식으로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달리 천일제염의 경우 넓은 면적에 소금밭을 두고 해수를 증발시켜 소금을 채취했기 때문에 대량 생산은 가능했으나 생산된 소금을 창고에 보관하면서 간수를 빼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일제강점기 소금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자 조선총독부에서는 천일제염의 대량 생산과 전통식 전오염의 생산속도를 절충하는 개량 염전의 개발에 들어갔다.

1929년 조선총독부 전매국에서 출자한 조선염업주식회사가 염전을 설치했던 곳이 이곳 토지금고 일대였다.

낙섬에서 능안삼거리와 용현동 돌산(현 용정근린공원)까지 제방을 쌓아 만든 이 염전은 낙섬염전 또는 독각다리염전이라 불렸다.

천일제염과 전오염의 장점만을 취합한 염전으로 천일염전의 결정지와 간수창고 대신 대형가마가 설치된 공장이 있었다.

 해방 이후에는 제염기술자양성소가 자리잡기도 했는데 1966년 주안염전과 함께 폐염이 되면서 토지가 매각됐던 것으로 보인다.

낙섬염전은 대량 생산이 가능한 천일염의 장점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닷물을 대규모로 가둘 수 있는 저수지가 필요했다.

 바다와 저수지 사이의 수문은 낙섬 바로 북쪽에 뒀으며, 밀물 때 수문을 열어 바닷물이 들어차면 수문을 닫아 가두는 방식으로 저수지를 활용했다.

이 저수지의 경우 변변한 놀이시설이 많지 않았던 1950~60년대 인근 학생들의 수영장으로 각광받았다.

여름방학 기간이면 숭의동·용현동은 물론, 멀리 신흥동·도원동에 사는 학생들로 북적이던 곳이었는데 사람들이 많이 몰리다 보니 익사사고도 빈번히 발생했다고 한다.

인근에 있던 숭의국민학교나 용현국민학교의 경우 여름방학이 끝나면 한 학년에 한 둘은 빈자리가 생겨났다고 하니 당시의 익사사고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 토지금고, 무얼 보관하는 금고일까?

▲ 용현동 610번지 주택군.

1966년 주안염전이 폐염이 되면서 낙섬염전도 함께 문을 닫았다. 높아져가는 토지가치에 비해 생산성이 낮았던 이유에서였다.

염전이 있던 땅은 고려염업이라는 민간제염회사로 팔렸다가 대우실업에서 인수하게 됐다.

그리고 1976년 대우실업은 14만8천여㎡의 염전 땅을 토지금고에 10억 원을 받고 팔았다. 염전 땅을 인수한 토지금고는 어떤 회사인가?

토지금고는 지금 LH, 즉 토지주택공사의 전신이다. 1974년 제정된 ‘토지금고법’에 의해 1975년 4월 설립된 정부투자 공기업이다.

기업이나 개인 소유의 비업무용 토지를 매입해 업무용, 주택건설용 대지로 전환한 뒤 다시 매각해 투기를 방지하고 토지 이용도를 증진시키려는 목적에서 설립됐다.

1978년 12월 한국토지개발공사로, 1996년에는 한국토지공사로 회사명을 변경했고, 2009년 대한주택공사와 합병해 한국토지주택공사가 됐다.

1977년 6월 토지금고에서는 이곳에 6억9천200만 원 규모의 1차 토지상환채권을 발행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토지채권에 해당한다.

1필지 당 165~198㎡으로 제한해 4만6천280㎡를 266필지로 분할 매각했고, 1년의 상환기간이 지나면 택지로 분양받거나 연리 13%의 원리금으로 반환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거둬들인 금액으로 택지조성사업에 들어가 택지는 물론 도로, 상하수도, 전기 등 기반시설을 갖추기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2차 토지상환채권 11억 원을 발행한데 이어 1978년 3월에는 4차 토지상환채권 13억 원을 발행했고, 그해 6월 1차분 채권의 상환기간이 만료되자 용현동 610, 627번지 일대를 비롯한 땅에 모범주택단지를 분양했다.

지금 토지금고라 불리는 용현2동과 5동 일대에는 당시 분양받았던 택지에 지어진 집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토지금고는 폐쇄적이자 열려있는 동네다. 한때 이곳은 육지의 끝이었기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막힌 동네였다. 그러던 이곳에 시간이 흐르면서 길들이 생겨났다.

 철길과 역이 생기고, 고속도로와 터미널이 만들어지고, 섬을 깎고 바다를 메워 관광도로가 생겨나는가 하면, 항구가 커지면서 부두와 엉덩이를 맞대고 사는 동네가 돼버렸다.

▲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하지만 이 길들은 도리어 이곳의 공간을 나눠 놓았다. 남쪽으로부터 제2경인고속도로를 시작으로 경인고속도로, 수인선, 주인선이 공간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토지금고 사람들 간의 소통을 차단하고 있다. 그러나 토지금고 사람들은 이 길들을 통해서 외부와 소통해왔다. 이렇듯 길은 토지금고 사람들에게 공간을 가르는 벽이 되기도 하고, 외부와의 소통창구가 되기도 한다.

변화가 빠르고 잦은 현대사회 속에서 토지금고 사람들은 변화를 거부하는가 하면, 그 변화에 매우 민감하게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폐쇄성과 개방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토지금고라는 공간과 그 공간을 살아가는 토지금고 사람들은 매우 닮아있다.
<글=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 인천염전 평면도.

1929년 4월 조선염업주식회사에서 낙섬 앞바다 16만5천여㎡를 매립해 준공한 인천개량염전의 1:3천 평면도이다. 조선염업주식회사는 1927년 3월 오사카에서 자본금 50만 엔으로 설립됐으며, 조선총독부와 인천의 상공인들이 투자한 회사였다.

이 회사에서는 부천군 다주면 장의리(현 숭의동)에서 낙섬까지, 그리고 낙섬에서 문학면 용정리(현 용현동)까지 제방을 쌓은 뒤, 그 안쪽을 염전으로 개발했다. 그리고 천일염과 전오염의 장점을 결합한 개량염전으로 개발한 탓에 소금밭에서 채취한 고농도의 염수를 끓일 가마를 갖춘 공장이 필요했고, 지금 인천노인복지회관 자리에 대형가마 5개를 갖춘 공장을 건설했다.

해방 이후 이 염전은 양질의 소금을 채취하기 위한 인천시험염전으로 명칭을 바꾸고 주안염전에서 관할했다. 그리고 천일염만을 생산하는 것으로 생산방식을 바꾸는 한편, 공장을 폐쇄하고 그 자리에 제염기술자 양성소를 뒀다.

이 도면은 1959년 당시 이 염전에서 제염기술자로 근무했던 김명국 선생(남구 주안동)이 기증한 것으로 공장시설이 축소된 형태로 표기되고 있어 해방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염전의 전체 규모를 잘 파악할 수 있으며, 도면 우하단에 없어져버린 낙섬의 흔적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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