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중반에 발생한 大흑사병은 박테리아의 일종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가 원인균이다. 벼룩이 감염된 쥐의 피를 먹고, 다시 사람의 피를 빨면서 병이 옮겨졌다는 게 통설이다. 유럽에서는 인구의 절반(1억여 명)이, 중국 원나라는 30%(3천만 명)가 이 병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회체제를 붕괴시키고, 싸울 사람마저 없어서 전쟁까지 사라질 정도였으니 당시의 충격은 가히 상상하기도 힘들 것 같다. 두고 봐야겠지만 메르스 사망자 수(21일 기준 사우디아라비아 451명, UAE 11명, 한국 25명)를 놓고 볼 때 과거에 비해서 새삼 놀랍거나 충격적인 상황은 아니다.

최근 보건당국은 사스 연구에서 혈장 치료로 사망률이 23%까지 낮아졌다는 점에 착안, 완치자의 혈청으로 치료를 시도하는 중이다. 일본에서는 메르스에 강하게 결합하는 항체를 대량 정제하는 데 성공했다고 산케이신문이 19일자로 전했다. 메르스가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무서운 바이러스인 것은 맞지만 이에 대처해 나가는 인류의 과학 수준도 만만치가 않다.

정작 문제는 질병을 통제하는 메커니즘에서 많이 노출됐다. 우선 방역 과정에서 건전한 시민의식에 의존했던 소위 ‘자발적 신고와 자가격리’ 방식이 최선의 조치였는가 궁금하다.

거주지를 무단 이탈하는 자가격리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회의감은 더욱 가중된다. 둘째, 격리병동은 일반병동으로부터 충분히 떨어진 독립된 건물로 구축하는 게 옳은 방향이 아닌가 싶다.

 비용이나 인력 운용 측면에서 비효율적일진 모르나, 병원 내 2차 감염의 가능성을 낮추는 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사선에서 치료에 전념하는 의료진의 안전성이 간과된 것 같아 아쉽다. 평상시 주기적인 대응훈련을 통해 보호장비를 점검하고 현장통제 요령을 습득함으로써 안전성을 제고해야겠다.

질병통제 기제(機制)와 함께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요소는 심리적 기제다. 정부의 폐쇄적인 태도가 잘못된 정보를 양산해 냈고, 허술한 방역조치가 심리적인 공포를 확대시켰다.

이렇게 만들어진 무지와 공포는 사소한 상황에서도 비이성적인 분노로 전이될 수 있다. 대흑사병이 시작됐을 때 외국인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며 집단적인 폭력과 학살이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고 한다.

비록 여러 면에서 돌아가는 상황에 화가 치밀지라도 지금은 인내를 가슴에 품고 냉철한 이성으로 문제를 봐야 할 때다. 자칫 분노를 잘못 표출하면 우리 사회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수 있음을 역사가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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