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절을 앞둔 상념(想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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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절을 앞둔 상념(想念)
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법학박사
  • 기호일보
  • 승인 2015.07.16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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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 후반은 ‘유신헌법’이 시행되던 시기였다. 법과대학 1학년이던 어느 여름날 무더운 방에서 헌법책을 읽다가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 운운’하는 문구를 읽던 중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도 안 되고 또한 너무도 졸려서 책을 들고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

 당시 유신헌법은 ‘민주국가의 살아있는 헌법’이라기보다는 ‘장식헌법’에 가깝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렇지만, 법대생들은 국가고시 준비를 위해 유신헌법 해설서를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해가 안 되면 통째로 암기해야만 했다.

아무튼 쏟아지는 졸음을 떨칠 수 없어서 1시간만 자고 돌아와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책을 둔 채 방에 내려갔다. 그런데, 알람소리에도 깨지 못하고 2시간쯤 꿀잠을 잤나 보다. 누군가 저녁밥 먹으라고 깨워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는데 창밖에 장대 같은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거 참 시원하게 잘도 온다!”라고 말하다 그만 수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뿔사! 옥상에 헌법책이 있는데……” 후다닥 옥상으로 올라가 흠뻑 젖은 헌법책을 싸안고 내려와 수건으로 닦고 또 닦았지만 한동안 책에서 빗물이 줄줄 흘렀다. 며칠에 걸쳐 정성을 다해 말렸지만 책은 결국 쭈굴쭈굴해지고 말았다.

책을 다시 살까 생각도 했지만 비싼 책값이 부담스러워 다소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졸업할 때까지 그냥 활용했다. 머릿속에 유신헌법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와 반감이 있던 터에 책마저 쭈글쭈글해지다 보니 다른 과목에 비해 헌법과목을 덜 공부하게 되었는데, 특히 ‘한국적 민주주의’를 서술한 부분은 건너뛰기(스킵)를 반복했다. 이런 연유로 해서 ‘유신헌법’에 대한 내 기억은 아직도 ‘쭈글쭈글한 채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1979년 10·26사태로 유신시대가 끝나고, 이후 신군부세력의 주도로 1980년 10·27개헌을 한 후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 철권통치를 이어갔다.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 직선제 도입 등 민주화된 헌법이 마련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유신헌법’과 ‘제5공화국 헌법’이 역사의 뒤꼍으로 사라지게 된 배경에는 수많은 국민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절의 헌법은 사라졌는데, 그 시절 그 헌법을 열심히 공부하여 사법시험 등 국가고시에 합격했던 ‘최고의 엘리트’들은 현재 우리나라의 지도적 지위에 올라 있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등에 몸담고 있는 상당수 고위 법관들의 머릿속에는 아마도 당시에 달달 외웠던 헌법책 속의 ‘한국적 민주주의에 관한 서술내용들(유신헌법의 법리)’이 그대로 남아 요즘 판결을 내릴 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예컨대, 헌법재판소는 지난 5월 28일(노조 조합원 자격을 현직 교사로 제한하고 있는) 교원노조법 2조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사건에서 재판관 8(합헌)대 1(위헌) 의견으로 합헌 결정하면서 “국제노동기구(ILO) 등 국제기구의 권고를 위헌심사의 척도로 삼을 수는 없고, 그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위헌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에는 “국제노동기준을 위반한 고용노동부의 법외노조 통보는 취소되어야 한다”, “노동권과 결사의 자유에 대한 보편적 국제기준을 따르라”, “해직교사에게도 교원노조의 조합원 자격을 인정하라”는 국제사회의 권고와 여론에 대항하여 ‘한국적 민주주의’를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 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 고위 법관들의 고뇌가 배어있는 것 같아 안쓰러운 느낌이 든다.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배신의 정치’로 비난 받았던 유승민 의원이 지난 8일 새누리당 원내대표 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사퇴 기자회견에서 “저는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민주공화국’이란 국민주권주의의 실현, 군주제의 배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 우리 헌법의 핵심적 가치이다.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헌법 제1조 제1항을 언급한 뜻을 국민들이 곰곰이 새겨볼 일이다. 내일은 제헌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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