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하면 이루지 못할 게 없습니다. 여러분도 퀴리 부인처럼 자신이 뜻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힘차게 날개를 펴시길 바랍니다."

 ‘2015 세계 책의 수도 인천’ 지정을 기념해 기호일보사와 인천문화재단이 협력 사업으로 진행하는 ‘인천시민과 명사가 함께하는 애장 도서전’ 열세 번째 명사로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가천대 총장)을 만났다.

 이 회장은 자신의 애장 도서로 단연 ‘라듐의 발견과 마리 퀴리’(나오미 파사초프)를 꼽았다.

 어린 시절 ‘퀴리 부인’이라는 위인전을 읽고 커다란 감동을 받았고, 성년이 되어서도 너무도 치열했던 그녀의 생애를 되새겨 보기 위해 다시 찾아 읽은 책이다.

# 여고시절, 운명처럼 다가온 ‘퀴리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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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회장이 처음 ‘퀴리 부인’이라는 위인전기를 읽은 것은 유년 시절이었지만 입시를 앞둔 여고 2학년 때 다시 읽은 퀴리부인은 그의 이정표가 됐다. 자신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마리(퀴리 부인)’는 교사였던 아버지의 퇴직으로 가난에 내몰렸습니다. 어머니는 결핵으로 돌아가시고, 큰 언니도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죠. 그녀 자신도 기관지염을 자주 앓았지만 공부만은 출중했어요. 대학에 진학해 과학자가 되는 꿈을 꾸었지만 가정형편이 허락하지 않았고, 손위 언니인 ‘브로냐’도 영리한 학생이었는데,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꿈을 이루진 못했죠. 이후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며 23살 나이에 소르본대학의 늦깎이 대학생으로 입학하게 됩니다."

 자신처럼 딱한 처지의 소녀 마리가 대학에 들어가는 당찬 모습을 보면서 여고생 이길여는 의사로서의 길을 다짐한다.

 "이리여고에 다니면서 서울의대 입시 준비를 할 때 교실 밑바닥 반지하 공간에 틀어박혀 공부를 하거나, 집 뒤 방공호(防空壕)에서 촛불을 켜고 공부하곤 했었지요.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런 열정이 바로 마리 퀴리의 고난을 이기는 용기와 집념을 읽고서 알게 모르게 자극을 받은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회장이 어렵게 공부해 서울의대에 들어가 보니 여학생 숫자가 너무 적었다. 그때 ‘마리’의 소르본대학 시절을 떠올렸다고 한다.

 마리의 대학시절 남학생은 9천 명에 달했지만 여학생은 200명도 되지 않는 소수였다.

 60년 간격을 두고 서울과 파리 두 대학의 극소수 ‘여학생’의 존재가 비교되더라는 것이다.

 "그만큼 마리도 저도 남성 위주의 세상에 내던져져 그 벽을 뚫고 일어서는 데 힘겨운 경험을 공유한 셈이지요."

 # 마리, 퀴리 부인이 되다.

 이 회장이 또다시 감동받은 대목은, 마리가 젊은 물리학도 ‘피에르 퀴리’와 결혼해 ‘마리 퀴리’ 부인이 된 후부터다.

 1900년대 물리학자들은 ‘인간이 캐낼 수 있는 물리적 법칙이나 물질은 완전히 발견 검증되고, 이제 측정 같은 것만 남아 있다’는 타성에 젖어 있었다.

 마리는 이러한 안이한 주장을 믿으려 하지 않고, 남편과 함께 도전을 거듭했다.

 "마리는 외양간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는 실험실에 남편과 함께 틀어박혀 끝내 방사성 물질인 폴로늄을 발견해 냈고, ‘방사능(radioactivity)’이라는 말도 붙였습니다. 특히 폴로늄은 마리가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긴 했지만 잊을 수 없는 그녀의 고국 폴란드에서 따서 붙인 물질 이름이지요. 이를 계기로 방사성 물질에 관한 학문적 관심이 증폭되고, 마침내 오늘날 항암치료에 방사선이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업적으로 퀴리 부부는 190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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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 남편 피에르는 소르본대학의 교수가 되고, 마리는 남편 실험실의 주임이 된다.

 그런데 마리가 노벨상을 받은 데에도 비화가 있다.

 당시 여성에 대한 편견은 대단해서 ‘여자에게 노벨상을 줄 수 없다’는 분위기 때문에 후보명단에서 제외됐었다.

 그러자 한 심사위원이 이 사실을 남편에게 귀띔해 줬고, 남편이 마리의 공적을 빼놓을 수 없다고 탄원서를 내서 결국 공동수상의 영예를 안게 됐다.

 노벨상을 받자 프랑스 정부는 피에르 부부에게 최고의 훈장(레종 도뇌르)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부부는 의논 끝에 훈장을 사양하기로 하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교육부 장관님께 고맙다는 말을 전해 주기 바랍니다. 우리는 훈장 대신 단지 실험실 하나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장관님께 말씀 드려 주십시오."

 이러한 마리의 순수한 연구열을 높이 평가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도 "마리야말로 유명한 과학자 가운데 명예 때문에 순수함을 잃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리는 남편과 사별한 후 4년여 동안의 줄기찬 노력으로 1911년 그의 생애 두 번째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최초 퀴리 부부가 발견한 라듐은 화합물이었지만 퀴리 부인 혼자의 노력으로 라듐 금속을 분리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로써 퀴리 부인은 노벨상 역사상 두 번에 걸쳐 상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된다.

 이 회장은 말한다.

 "노벨상 2회 수상이라는 찬란한 빛, 그 뒤에는 고통과 인내로 얼룩진 짙은 그림자도 있습니다. 마리의 연구실은 현대 설비를 갖춘 지금의 학자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실험 공간이 부족해지자 정원 한 켠의 헛간에 실험기자재를 옮겨 놓고 여름에는 찌는 듯이 덥고, 겨울에는 온몸이 꽁꽁 얼어붙는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했지요. 몇 t에 달하는 광석을 난로에 들어 나를 때는 환기 장치조차 없어서 연방 기침을 참지 못했지요. 이렇다 보니 훗날 연구원들은 ‘실험기구만 없었다면 헛간으로 여길 장소였다’고 당시를 기억했습니다."

# ‘박애·봉사·애국’으로 열정적인 삶과 도전정신을 키워라

 이 회장은 소녀 마리와 퀴리 부인의 일생에서 자신의 인생철학을 세우는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마리의 일생은, 제가 세운 가천길재단의 ‘박애·봉사·애국’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녀는 조국 폴란드를 따서 폴로늄이라는 물질 이름을 붙일 정도로 ‘애국심’에 불타는 여자였습니다. ‘봉사’ 정신은 평생 호의호식 같은 것은 생각조차 못해보고 오직 인류애와 과학정신으로 방사능과 라듐 분석에 매달리다 결국 방사능 노출이 심해져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 증명합니다."

 이들 가치 중 처음으로 꼽히는 ‘박애’를 실천한 마리 퀴리의 면모를 이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남자 연구원들이 징집을 당해 연구소가 비게 되자 마리는 딸 ‘이렌’과 함께 뢴트겐장치(X레이)를 실은 구급차를 마련해 전쟁터로 자원해 나갔습니다. 한 명의 목숨이라도 더 살리고 한 사람의 상처라도 더 돌보아 주겠다는 나이팅게일의 마음으로 전쟁터를 헤맸던 것이지요. 그러한 마리의 박애 정신과 방사능의 의학적 활용도를 높이 평가해 프랑스 의학아카데미는 최초의 여성 회원으로 마리를 받아 들였습니다. 그녀의 몸에 밴 박애와 봉사의 정신이 남성위주의 철옹성 같은 ‘금녀의 벽’을 무너뜨린 결과입니다."

 이길여 회장은 마리 퀴리의 ‘열정적인 삶과 도전정신’을 제자들인 가천대 학생들에게도 강조하곤 한다.

 "프랑스는 박애·봉사·애국을 온 몸으로 실천한 과학자 마리 퀴리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1995년 4월 유명한 관광명소이기도 한 ‘판테온’으로 그녀의 묘지를 이장했습니다.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장자크 루소 같은 위인들이 잠든 국립묘지에 마리의 사후 61년을 기해 이장한 것이지요. 여성이 판테온에 묻힌 것 또한 프랑스 최초의 일입니다. 우리 사랑스러운 가천대 제자들도 그녀의 열정적인 삶과 도전정신을 조금씩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 마리 퀴리 같은 삶

 이처럼 이길여 회장이 퀴리 부인의 삶을 조명하는 데는 그의 삶 역시 쉽지 않은 길을 걸어오면서도 늘 꿈꾸며 도전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의사가 된 이 회장이 인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58년이다. 당시 인천에는 부인병을 고치는 산부인과가 거의 없었고 많은 환자들이 죽음 직전이 돼야 병원을 찾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회장은 병원조차 제대로 찾지 못하는 그들의 안타까운 모습에 하루 24시간 진료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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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시간 언제든지 몸이 아프면 갈 수 있는 병원이 있다는 사실은 빨리 소문이 났어요. 그 병원에 가면 젊은 여의사가 아무 때나 진료를 해준다 하니 많은 환자들이 몰려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24시간 진료를 했는지, 저조차 신기할 따름입니다."

 이 회장은 선진 의료기술을 익히기 위해 1960년과 1970년대 두 차례 미국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후 달라지지 않는 인천의 의료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고 종합병원을 세운다. 이렇게 1978년 동인천 길병원이 탄생하고 지금의 종합의료재단인 길병원의 효시가 된다.

 종합병원에서도 눈물나는 사연은 이어진다.

 "1970년대는 지금처럼 의료보험이 없어서 보증금이란 게 있었어요. 병원치료를 받으려면 진료비를 내야 하는데, 형편이 어려운 탓에 돈을 안내고 도망치는 경우가 많아 보증금이 없으면 진료를 거부하는 병원이 있었지요. 어느 날 제가 한 환자를 돌보려는데 처음부터 진료를 거부하는 거예요. 이유를 물으니 돈이 없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당장 죽게 생겼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그때 다짐했지요. ‘우리 병원에서는 보증금을 받지 않겠다’고요. 생명부터 살리는 게 의사의 도리이기 때문이지요." 문을 연 길병원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경쟁 병원이 150명이 오면 길병원은 300명이 오는 식이다.

 그렇게 길병원은 가천대와 뇌과학연구소, 암연구소 등 인천을 넘어 전국에서도 으뜸 중의 으뜸으로 꼽히는 종합의료재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처럼 퀴리 부인은 이 회장의 이정표가 됐고 이 회장은 퀴리 부인과 가는 길은 달랐지만 역경을 이기고 인생의 꿈을 실현하는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후배 의학도들이 항상 용기를 잃지 않고,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하길 당부했다.

 "마리 퀴리는 제 인생의 등불 같은 존재였어요. 가난하고 궁핍했던 유년 시절을 딛고, 노벨상을 두 번이나 탄 위대한 과학자로 우뚝 서기까지, 열정을 불태우며 도전하는 삶을 살아간 그녀의 위대한 영혼에 감동할 따름이지요. 우리 후배 의학도 여러분도 마리 퀴리의 일생을 들여다보고, 자신들의 멋지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시길 빌어봅니다."

   대담=원현린 기호일보 주필      

   한동식 정치부장 dshan@kihoilbo.co.kr

   정리=이재훈 기자 ljh@kihoilbo.co.kr

   사진=최민규 기자 cmg@ki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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