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교육신보 ‘언론의 봄’ 마중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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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교육신보 ‘언론의 봄’ 마중물로
40년 전 인천언론은
  • 이병기 기자
  • 승인 2015.10.08
  • 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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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일보의 전신인 경기교육신보가 창간했던 40년 전인 1975년은 ‘인천언론의 암흑기’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후 1987년 민주화운동의 산물로 언론의 자유가 일부 허용하면서 맞은 1988년은 지방신문 창간이 줄을 이었다. 기호일보 역시 이때 창간했는데 이때를 ‘언론의 봄’으로 분류한다.

 1970년대 유신정권의 ‘1도 1사’ 언론정책으로 ‘암흑기’를 맞았던 인천 언론은 1980년대 들어 기호일보와 인천신문의 탄생으로 15년 만에 지역의 목소리를 담게 된다. 이후 경기일보와 중부일보가 창간하며 인천을 중심으로 한 경인지역은 5개 신문 중심의 언론체제로 운영된다.<편집자 주> 

# 언론암흑기 속 경기지역 언론

 경기교육신보가 창간한 40년 전 인천 언론은 어땠는지 살펴보자. 기호일보의 전신인 경기교육신보가 창간된 1970년대는 인천 언론의 암흑기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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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교육신보 1976년 3월 1일자 1면.

 박정희 정권은 1973년 ‘1도(道) 1사(社) 언론정책’으로 ‘경기 3사 통폐합’을 진행한다. 이에 따라 1960년대부터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언론활동을 했던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연합일보, 경기일보는 경기신문으로 통폐합된다.

 당시 인천 언론인의 자존심이라고 불렸던 경기연합일보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주가 바뀌고 본사를 수원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연합일보는 두 개의 신문을 통폐합시켜 가져가 버려 졸지에 인천에서 언론은 사라지게 된다.

 당시 경기매일신문의 편집국장이었던 김형희 씨는 ‘인천언론회보 제16호(2003년 8월자)’를 통해 이렇게 회상했다.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는 통합이라는 미명 하에 1973년 8월 31일 연합신문 사장에 의해 강탈당했다. 이로써 인천은 신문사 없는 도시가 됐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 탈법의 현장에서 무엇을 했던가. 불법자의 폭력에 너무나 연약했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목적 수행의 요식행위에 순응하는 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정부의 ‘1도 1사’ 언론 정책에 따라 경기 3사 통합추진위원회가 발족하고 ‘합의’가 이뤄진다. 그해 7월 31일에는 올림포스호텔에서 ‘3사 통합대회’가 열리고 ‘발표문’과 ‘성명서’를 낭독해 유신정권의 ‘강압’에 의해 언론 경영자들이나 종사자들은 가슴만 쳐야 했다. 당시 지역 인사들은 몇몇이 모일 때마다 통폐합을 얘기하며 심하게 반발하는 분위기였다고 「인천언론사」는 적고 있다.

 통폐합 이후 인천에는 지역에 본사를 둔 신문사가 없는 언론 공백 시대가 이어진다.

 수원시 교동에서는 그해 9월 1일 3사 통합을 통해 경기신문이 창간된다. 경기신문은 이후 9년 후인 1982년 경인일보로 발행된다.

 경기신문은 1도 1사라는 유례없는 좋은 여건 속에서 날개를 단다. 기자들을 새로 뽑고 사옥을 증축한다. 매일 4면씩 발행하던 지면은 격주 8면 발행으로 늘었고, 1977년 창간기념일을 기해 매일 8면으로 발행 면수를 늘려갔다. 또한 인천국을 인천분실로 승격시키고 중구 항동 4가 전 인천전매청 건물을 매입해 별도의 사옥을 마련, 직영체제로 운영한다. 이후 사세를 더욱 확장한 경기신문은 신문 이외에도 ‘경기연감’, ‘경기교육연감’, ‘경기교육화보’ 등 출판사업도 활발하게 펼쳐 나갔다.

 # 경기교육신보 창간

 인천에 뿌리를 둔 신문이 하나도 없는 ‘암흑기’ 동안 언론인들의 몸부림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는 잡지를 발간해 언론을 대신해 보려 애쓰기도 했고, 다른 이들은 주간지를 창간해 인천의 소식을 전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이런 시도 속에서 1975년 10월 10일 태어난 언론이 바로 ‘경기교육신보’다.

 언론 공백기를 맞아 모두 허탈해 있을 때 비록 주간신문이지만 ‘경기교육신보’가 창간하게 된 것이다. 당시는 전국에서 어떤 일간지나 주간지도 창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 창간 작업은 교육관계 특수지를 내세워 당국의 허가를 받아내는 ‘편법’을 동원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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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교육신보.
서강훈, 김경룡 등이 주축이 돼 10월 10일 창간호를 발행한 경기교육신보는 유신 이후 전국에서 신문잡지로는 처음 창간하는 기록을 갖게 됐다.

 당시는 ‘인천공보’가 시청 회보로 들어가고, ‘주간인천’이 인천신문으로 탈바꿈하면서 이렇다 할 주간지가 없었던 상황. 특수 주간지이긴 하지만 인천의 끊어진 언론의 맥을 잇고 인천의 유일한 언론기관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됐다.

 ‘교육 총화의 기수’를 사시로 내세운 경기교육신보는 창간사에서 "변화하는 사회적 요청에 따라 향토 교육문화의 공기로서 향도적 역할을 맡아 나가겠다"고 다짐한다. 인천에서 뜻있는 행사를 해도 보도하는 신문이 없어 불편해하던 문화단체들은 경기교육신보에 보도를 요청하는 등 종합일간지의 대안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경기교육신보는 1988년 언론 암흑기였던 인천 언론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기호신문’의 전신이 된다.

 인천 언론의 ‘암흑기’를 넘어 1980년대 후반은 인천 언론의 ‘봄’이라고 불린다.

 정부는 6월 민주항쟁의 성과물로 1987년 국민들의 요구를 수용해 ‘6·29선언’을 하게 된다.

 6·29선언에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비롯해 ‘자유 언론의 창달’이 담겼고, 지역에서는 기호신문이 창간을 준비하며 언론 암흑기를 걷어낸다.

 1988년 7월 20일 중구 중앙동 1번지에서 ‘기호신문’이 탄생한다. 유신 시기 말 못하는 도시의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발행됐던 ‘경기교육신보’라는 특수 주간지가 모태가 됐다.

 기호신문은 수도권(기호지방)을 중심으로 경인지역의 중추적인 언론으로 소명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기호신문은 공정과 책임, 정론, 진실을 사시로 내세우고 일간지를 제작하는 편집1국과 월간 화보 ‘수도권’을 만드는 제작2국을 뒀다. 또한 총무국과 업무국, 공무국 등 조직을 가능한 한 줄였으며, 취재 인원도 소수정예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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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의동 사옥.

 이후 당초 1일 8면에서 16면으로 지면을 늘렸고, 속출하는 주간지들과의 구분을 위해 창간 4개월 만인 1988년 11월 28일 ‘기호일보’로 제호를 바꿨다.

 1992년 3월 1일 보도한 ‘일제 살육의 현장’ 기사는 당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기호일보가 입수한 한인 작두 처형 사진 10여 장은 당시 일제의 잔학성을 세상에 다시 한 번 폭로한 생생한 자료였으며, MBC와 KBS 등 방송을 통해서도 소개됐다.

 기호일보는 경기교육신보 창간을 시작으로 창사 40년, 기호일보 창간 27주년인 2015년, 24면 증면과 다양한 콘텐츠 적용 등 지역 언론을 이끌 또 다른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기호일보, KIHOIL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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