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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채훈 삼국지연구소장
지난주 송년모임에서 중국인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그래도 너희들은 국민이 위임해 준 권력의 범위를 지켰는지 아닌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선거제도가 있지 않느냐. 국민이 선택하면 되는데…." 이 소리에 좌중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정치 형태에 대한 갑론을박이 사치스러운 투정처럼 되고만 까닭을 정치인들에게 돌린다면 지나친 걸까? 미국의 한 심리학자는 "정치인들이 권력을 갖게 될수록 보통 사람들의 룰에 맞추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환상을 갖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벼랑 끝으로 몰아 시험해 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고 했었다.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정치인이 ‘자신들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공복(公僕)이며 심부름꾼’이라고 되뇌던걸 까맣게 잊고 자기 자녀들의 취업과 학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나 출판업자도 아니면서 책값을 거둬들이는 것이나 심지어는 비서관의 급여를 상납받는 경지에 이른 걸 보면 아연실색할 노릇이다. 더 끔찍한 건 이런 갑질이 별것 아닌 ‘그럴 수 있지’하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이것이 빙산의 일각이며 ‘갑(甲)질’을 할 정도의 권세가 있다는 투의 일반인 성향이나 인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 참담하다. 

 도처에서 국가적 위기가 다가온다는 건 대다수 시민들도 익히 알고 있다. 아니 정치인들이 오히려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인식도 널리 퍼져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정치권력 행태에 대해 탄식만 하고 있는 걸까. 이미 국민들이 하지 말라는 일, 원하지 않는다고 무수히 소리친 그 일들을 너무나 많이 한 오늘의 정치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질주하고 있는 듯하다. ‘헬조선’이라는 말도 ‘망한 민국’이라는 거칠고 절망적인 아우성도 이제 둔감해진 현실이라면 과언일까.

 정치인이나 유권자나 모두 변해야 한다. 사실 변할 것 같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세상 만물은 변한다. 그런데 이 땅의 정치인과 유권자들은 그리 변하지 않는다. ‘혁신’이니 ‘민생’이니 하는 정치인들의 구호는 변하지 않는 자신을 치장하는 레토릭일 뿐이다.

 내년 4월 총선은 다당제로 변하리라는 예측도 마찬가지다. 신장개업한다고 그 밥에 그 나물이 아니라 할 수 있나? 집권당이나 야당이나 기호 1·2·3으로 누가 유리할 것인지 열심히 주판알을 굴리면서 또 어떤 현란한 말솜씨로 표를 얻겠다고 할 것인지.

 해답은 하나다. 오로지 참여다. 투표율이 높으면 어느 당이 유리하고 낮으면 어떤 결과가 예측된다는 그 잘난 정치평론가들을 머쓱하게 해 줄 유일한 해결책은 총선 투표율이 80%는 넘어야 가능하다. 중국 친구의 말처럼 여야를 불문하고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권력의 범위를 누가 성실히 지켰는지’를 분명하게 해 줄 길은 투표에 참여해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하는 일뿐이다.

 여당에 힘을 실어 주고, 강력한 야당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유권자의 의무다. 아니 무한 책임이라고 해야 옳다. 이 땅의 어느 세대건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 ‘어렵다’, ‘안 된다’고 하지 말자. 지금 중국과 일본 등 이웃 나라들은 어떠한지를 두 눈 부릅뜨고 살펴보라. 짝퉁이나 만들어 싸게 파는 중국도 아니려니와 20년의 잃어버린 세월에 주저앉고 있는 일본도 아니다. 그들은 지금 세계를 향해 힘찬 나래를 펴고 있다. 그들의 정치는 변하고 있으며 리더십은 실용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불합리한 것’에 철퇴를 가하는 싸움을 걸고 있다.

 2016년은 붉은 원숭이라고 한다. 손오공처럼 창공을 날고 삼장법사를 지키며 온갖 괴물들에게 철퇴를 내리는 의미를 곱씹어 보는 해다. 새해의 과제는 분명하다. 이번만큼은 곁불 쬐지 말고 시민의 손으로 불꽃을 피워야 한다. 일찍이 플라톤이 그랬다. 참여하지 않는 국민에게 내리는 벌은 자신보다 못한 자의 지배를 받는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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